<해외문화유산을찾아서>21.청자辰砂彩唐草文 대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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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책으로만 보았던 이 명품을 마주했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정신이 완전히 나갈 정도로 거기에 빠져 며칠 내내기분이 상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동행했던 미국 클리블랜드박물관동양부장 마이클 커닝햄도 대영박물관 소장품 가 운데 최고의 진품(珍品)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양모(鄭良謨)국립중앙박물관장은 지난 84년 영국 대영박물관을 찾아 「청자진사채당초문완(靑瓷辰砂彩唐草文碗)」을 처음 보았을 때의 흥분은 아직도그 무엇에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청자를 한두번 접해본 그가아니지만 이만큼 고려의 빼어난 기량이 흠뻑 담긴 작품은 거의 찾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청자진사채당초문완」은 세계 최고의 컬렉션을 자랑하는 대영박물관에 있다.1759년 런던 중심부에 문을 연 대영박물관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동.서양의 위대한 보물들을 한자리에 모은인류 문화유산의 최대 보고.매년 6백만명 가량의 관람객으로 발디딜 틈 없이 항상 북적거린다.
이 박물관의 북쪽 입구와 계단에는 주로 고려.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예술품이 상당수 진열돼 있다.일본이나 중국에 비해서는 전시장 규모.내용 모두 빈약한 편이지만 오는 97년 현재도서관으로 사용되는 장소에 한국관이 정식으로 오 픈되면 그 양상이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도자기.회화.공예품등 이곳에 소장된한국 문화재는 모두 1천여점.갓이나 부채등 민속품이 3백여점,각종 주화(鑄貨)도 모두 2천여점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눈부시게 빛나는 명품이 바로 「청자진사채당초문완」이다.1938년 대영박물관이 그리스 수집가인 유모포퓨러스로부터 구입한 7백63점 중의 하나다.
12세기 전반 고려청자의 절정기에 빚어진 이 청자는 진사채(辰砂彩)라는 고려의 독특한 기법을 손이 가는대로 아낌없이 마음껏 펼친 명품이다.진사청자가 다수 전해오고 있지만 이처럼 진사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은 세계에서 오직 이것 하나밖에남아있지 않을 정도의 귀중품이다.
고려청자에 진사채 의장(意匠)이 시작된 때는 12세기 전반.
진사채는 산화동(酸化銅)으로 이뤄졌는데 이 채료로 무늬를 그린후 유약을 씌워 높은 온도에서 구워내면 산화동이 깊이 있는 진홍색으로 곱게 발색된다.중국에서 진사채를 쓰기 시작한 것이 고려보다 2백년가량 늦은 13세기 후반이므로 고려는 세계에서 최초로 진사채를 사용한 셈이다.
진사라는 말은 원래 일본사람들이 붙였다.따라서 원광대 윤용이(尹龍二)교수는 『한국도자사연구』에서 「동화(銅畵)의 청자」 혹은 「동채(銅彩)청자」가 올바른 용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고려인들이 진사를 결코 남용하지 않았다는 사실.포도알이나 모란꽃잎 등 필요한 부분에만 아껴 썼다.의장에 있어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청자는 진사채만으로 안팎을 호사스럽게 장식한 유일한 경우다.안쪽에는 불교에서 이상화한 꽃인 보상화(寶相華) 네개와 이를 중심으로 비꼬여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나가는 넝쿨의 당초(唐草)무늬를 화려하게 채웠다.또 입부분 안쪽 에도 넓은 띠를 두르고 이를 오직 진사 하나로 채색했는가 하면 바깥쪽에도작은 모란꽃 네송이를 역시 같은 진사채로 장식했다.
특히 붉은 진사빛 가운데 푸른 청자빛이 영롱하게 흐르고 당초무늬 중간중간에 하얀 선이 언뜻언뜻 보여 치밀하고 화려했던 고려문화의 특성을 웅변적으로 대변한다.
반면 이토록 호사스러운 대접도 조용히 바라보면 장식이 지나친데가 없고 화려한 색채도 고작 진홍빛에 그쳐 한국인의 담백한 심성을 정직하게 보여주기도 한다.또 맑고 투명한 청자빛 유약과하나의 흐트러짐도 없는 선(線),그리고 상대적 으로 작은 굽이안정감 있게 윗부분을 받쳐주는 날렵한 기형(器形)도 고려청자의개성을 온몸에 휘감는 듯하다.
국립중앙박물관 鄭관장은 『진사는 자칫하면 색이 날아가고 칙칙한 녹색(綠色)으로 변질되기 쉬워 이 작품은 일종의 기적』이라며 『고려인들의 청자에 대한 실험정신과 자신감이 농축된 세계 최고의 명품』이라고 말했다.
한편 대영박물관 창고에 깊숙이 감춰져 영국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이 「청자진사채당초완」은 창간 30주년을 맞은 中央日報社가호암미술관과 함께 9월10일까지 호암갤러리에서 열고 있는 「대고려국보전:위대한 문화유산을 찾아서⑴」에 나와 음산하고 축축한런던이 아닌 맑고 청명한 고국의 하늘에서 그 특유의 붉고 푸른빛을 낭랑하게 떨쳐보이고 있다.
▧ 다음은 나전국화문경함(螺鈿菊花文經函)입니다.
런던= 글 :朴正虎특파원 사진:蔡興模특파원, 대영박물관 제공자문위원:鄭良謨 국립중앙박물관장 安輝濬 서울대박물관장 洪潤植 동국대박물관장 朴英淑 런던대 아시아. 아프리카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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