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수사 발표요지-19일오후 시위대에 첫 發砲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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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5월3일전남대생 3천여명의 시국성토대회를 시작으로 시위가 잇따랐다. 14일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전남대.조선대 교정에 진입했다.
15일 오전 대학생 1만5천여명이 전남도청앞에서 연합 가두시위를 벌였고 학생회 지도부가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에 대비,『다음날 오전 10시에 학교정문앞에 모여 시위를 벌인 다음 정오에도청앞 분수대로 집결하라』는 투쟁방침을 전달했다 .16일 오후4시 대학생 3만여명이 전남도청앞 집회에 이어 가두행진을 벌였고 오후8시 도청앞 횃불시위후 5.16화형식을 끝으로 해산했다. 오후8시 7공수여단에 『17일 오후8시부로 2군사령관 작전통제아래 전남대.조선대등을 18일 오전2시까지 점령하고 오전4까지 소요 주모자를 전원 체포하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광주지구 보안부대는 보안사 지시에 따라 재야인사와 학생회 간부등 연행대상자 22명중 정동년.권창수등 8명을 체포했다.18일 새벽 7공수여단 33대대는 전남대에,35대대는 조선대에,32대대는 충남대에 각 배치됐다.
***5월18일 ▲전남대및 광주시내=오전9시 등교를 저지하는7공수 33대대와 전남대생들이 충돌했고 오전10시30분 전남대생등 1천여명이 금남로에 집결,「계엄해제」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해 경찰과 충돌했다.
▲7공수여단 시위진압 투입및 11공수여단 증원=오후 11공수여단 61,62,63대대가 광주로 이동했다.
시위대의 투석으로 흥분한 공수부대원들은 인근 점포나 골목 안까지 추격해 시위대를 체포했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와 시민들을 진압봉으로 가격,도주를 막는다는 이유로 체포된 시위대의 상의나하의.혁대를 벗기거나 기합을 주기도 했다.이날 시위대 2백73명이 체포됐다.
***5월19일 ▲11공수여단의 배치및 시위=오전9시30분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1개 공수여단의 증원을 요청했다.
공수부대의 강경진압에 분노한 시민.학생등이 시내 요소요소에 모이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상가가 철시했다.
시위대는 금남로사거리.충장로 1가등에서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격렬한 저항을 했고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충장로 일대 다방.여관.민가를 수색하고 검거한 시위대를 진압봉으로 가격하거나 군홧발로 차고,옷을 벗겨 연행했다.
오후2시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도지사.교육감등이 참석한 가운데광주지역 기관장회의를 개최했다.이 자리에서 지역기관장들은『軍의진압행동이 너무 과격하다』며 연행자 전원 석방과 명단 공개를 요구했다.
오후1시30분 시위대 4천~5천여명이 가톨릭센터앞에서 경찰을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졌고 일부 시위대는 기름통에 불을 붙여 경찰저지선으로 굴리고 공중전화 부스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돌을 던지는 등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오후5시 11공수 63대대 일부가 광주고 부근 동원예식장 건너편에서 시위대에 포위됐을때 시위대 몇명이 불붙은 짚단을 장갑차 뚜껑을 열고 장갑차속으로 던져넣으려 하자 장갑차에 타고있던장교가 M16소총으로 위협사격해 김영찬(19)이 대퇴부 총상을입었다.이날 시위로 김안부(36)가 사망했고 군경 24명과 학생.시민 수십명이 부상했으며 부상자중 4명이 자상을 입었다.
***5월20일 ▲오전-3공수여단 추가투입및 계엄군 배치 상황=오전7시 3공수여단이 추가로 광주에 도착했다.
광주시내 중.고교가 임시휴교했고 상가는 절반가량 철시했고,10시 대인시장 주변에 1천여명의 학생.시민들이 금남로 방면으로진출하려다 장갑차를 앞세운 공수부대원들에게 밀려 산개됐다.
오전12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광주에 와 7공수여단 지휘부에들러 여단장등을 격려했고 윤흥정 전교사령관을 만난후 오후에 귀경했다. ▲오후-차량시위및 공수여단 시위진압상황=오후 3시50분 금남로2~3가에 5천여명,금남로3가에 3천여명이 운집해 군.경과 공방을 계속했고 오후 4시 2만~3만명으로 늘어난 전남도청 인근 시위대는 드럼과 화분대등을 굴리면서 군.경의 저지선으로 접근했다.
오후6시 무등경기장에 택시 1백여대가 집결,계엄군을 몰아낼 것을 결의한뒤 5~6대의 버스.트럭을 앞세우고 오후7시 전남도청앞 관광호텔까지 진출했다.
오후8시30분 시위대 5천여명은 광주상황이 8시뉴스시간에 보도되지 않자 문화방송국건물에 화염병을 던졌고 방송국건물은 9시45분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오후8시20분~오후11시 역전파출소.광주시청.광주경찰서.서부경찰서등이 점거되고 광주세무서가 불타는등 전남도청을 제외한 광주전지역이 시위대에 장악됐다.
오후12시 상황이 위급하다고 느낀 지역대장과 중대장들이 실탄지급을 요청하자 11공수여단 61대대장과 62대대장은 62대대장 지프에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실탄 15발정도가 든 탄창 1개씩을 중대장들에게 분배하고 위급시 대대장 명령에 따라 사용할 것을 지시했다.
오후10시30분 최세창 3공수여단장은 대대장들의 실탄지급등 지원요청에 대해 『위협용으로 사용하되 이외 사용시에는 사전에 보고하라』는 지시와 함께 경계용 실탄을 대대에 갖다주라고 지시,본부대병력 20여명으로 지원조를 편성,각 대대에 경계용실탄 1백여발을 전달했다.이날밤 광주역일대 시위진압과정에서 김재화(25)등 4명이 총상을 입고 사망했고 6명이 총상을 입었다.
***5월21일 ▲20사단 증원=20사단 61연대는 오전4시,사단사령부와 62연대는 오전8시50분 광주 송정리역에 도착했다.오전8시 광주에 도착한 20사단 지휘차량인솔대는 광주공단입구에서 수백명 시위대로부터 화염병공격을 받고 지프 14대를 탈취당 했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오전9시 20사단지휘차량을 타고온 시위대와 고속버스 5대를 타고온 시위대가 아세아자동차공장을 점거하고 장갑차 4대와 버스등 차량 56대를 탈취,광주시내로 진출했다.
▲계엄군조치=윤흥정전교사령관이 체신부장관으로 내정됨에 따라 소준열 육군종합행정학교장이 오전10시 전교사령관에 취임했고 오후4시 2개공수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31사단장으로부터 전교사령관으로 전환됐다.
▲전남대앞 시위=오전10시 전남대 정문앞 4만여명,후문 1만여명 시위대집결,3공수여단과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시위대가 무기를 탈취,무장했다는 첩보가 전파되자 13대대 중대장 이상 장교들에게 위급한 상황에서 지휘계통의 명령에 따라서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경계용실탄 탄창(30발)2개씩이 지급됐다. 이날 전남대앞 시위진압과정에서 주부 최미애(23.임신8개월)씨등 3명이 총격으로 사망하고 3명이 부상했으며,공수부대에 연행된 2명은 28일 광주교도소에서 사망했다.
▲전남도청앞 시위및 발포=전남도청앞 금남로 전면에 11공수 61.62대대가,노동청방면에 63대대,광주천방면에 7공수35대대가 각각 배치됐고 오전8시 수만명의 시위대는 시체2구가 실린손수레를 앞세우고 전남도청앞으로 몰려왔다.
오전10시 시위대 대표4명은 장형태 전남도지사를 만나 공수부대철수.연행자석방.계엄사령관 면담주선등을 요구했고,오전11시 장형태도지사는 헬기를 타고『계엄군을 철수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니 시민들은 자제하고 생업에 복귀하라』는 방송을 했고 이에 대해 시위대는 낮12시까지 공수부대 철수를 요구했다.
오전 11시 63대대장은 대대경계용실탄을 중대장들에게 1인당10발씩 지급했다.
오후 1시 공수부대와 시위대가 서로 10m 거리로 접근한 가운데 시위대의 화염병 투척으로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시위대 장갑차 1대가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했고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숨졌다.
7공수 35대대는 철수하던 31사단 96연대1대대 병력으로부터 경계용실탄 2백여발을 넘겨받아 장교들에게 분배했다.
시위대는 차량을 타고 광산.영광.함평.화순.나주.영암.해남.
강진.고창.승주등지로 진출해 화순 소재4개파출소에서 총기4백60정과 실탄 1만발을 탈취했고 나주경찰서에서 캘빈 5백여정.M1소총 2백여정.실탄 4만6천여발을 탈취했다.이날 하룻동안 일신방직.화순경찰서.한국화약등을 습격해 총기 4천9백여정.실탄 13만여발.TNT 10여상자등을 확보,무장했다.
시위대는 오후3시 광주공원에서 총기를 분배하는 한편 총기사용교육을 실시해 시민군으로 불리는 무장 시위대가 본격활동을 시작했다. 오후 5시 전남도청에 있던 7.11공수여단의 철수가 시작됨.이날 전남도청및 시내일원 시위진압과정에서 40여명이 총상으로 사망했다.
***5월22일 ▲계엄군=오전10시30분 2군사령부로부터 자위권발동지시가 정식으로 하달됐고 2군사령부는 전교사에 송정리비행장 확보및 무장시위대의 외곽탈출 방지를 각각 지시했다.
오후3시 2군사령부는 23일 오전2시를 기한 충정작전 계획을건의했으나 육본은 무력평정은 지역감정해소곤란,민간인 인질시 대처곤란등을 이유로 24일까지 대기할 것을 지시했다.
***5월24일 ▲계엄군 교대및 오인사격=31사단 96연대 병력이 부대로 복귀하던중 전교사 예하 기갑학교 병력이 시위대로오인,총격을 가해 96연대 사병 3명이 사망하고 군인2명과 민간인 10명이 부상했다.
오후 1시30분 주남마을을 출발한 11공수여단 선두가 무장시위대 병력 10여명을 발견하고 총격전을 벌여 효덕국민학교 놀이터에서 놀던 전재수(10)군등 2명이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오후 1시55분 효천역앞에서 전교사 보병학교교도대병력이 11공수 63대대를 무장시위대로 오인,집중사격을 가해 양측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병력9명이 사망하고 군인 33명과 주민 3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에 63대대는 부근일대를 수색,무장시위대 1명을 체포했다.
이과정에서 마을청년 권근립(33)등 4명이 무장시위대로 오인돼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5월25~27일 ▲崔대통령=낮12시15분 주영복국방부장관.이희성계엄사령관.전두환보안사령관.노태우수경사령관등이 참석한가운데 상무충정작전을 27일 0시 이후 전교사령관의 책임아래 실시하도록 최종결정했다.
상무충정계획을 보고받은 최규하대통령이 오후5시30분 광주를 방문,광주시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녹음한후 상경했으며 오후 9시 최규하대통령 담화문이 방송을 통해 발표됐다.
▲도청 진압=26일 오후6시 전남도청에서 수습위원들간에 마지막회의가 개최돼 진압작전시 무기를 반납하고 의연히 처벌받자는 의견이 다수로 채택됐으나 박남선등 최후항쟁파에 의해 내쫓겨 이들은 오후9시30분 모두 전남도청을 빠져나갔다.
27일 0시를 기해 전남도청 진압작전이 개시됐고 계엄군의 광주재진입 작전수행과정에서 시위대 17명이 사망하고 2백95명이체포됐고 계엄군3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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