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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34> ‘노스탤지어의 손수건’만 흔드실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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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간만에 책꽂이에서 시집을 한 권 꺼냈습니다. 무심코 펼쳤더니 청마 유치환(1908~67)의 ‘깃발’이란 시가 나오네요. 중학생 때 국어시간에 외던 시입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이란 구절이 가슴에 꽂히네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죠. 베란다 너머에 깃대가 보이네요. 그 끝에서 쉬지 않고 깃발이 펄럭입니다.

사람들에겐 ‘지향’이 있습니다. ‘저 푸른 해원’을 향한 끊임없는 ‘바라봄’이 있습니다. 종교와 명상의 오솔길에선 그걸 ‘목마름’이라고 부르죠. 영성을 향한 목마름, 본래를 향한 간절함이죠. 학자들은 그걸 ‘철학성’이라고도 부르더군요. 사람마다 강약의 차이는 있겠죠. 그러나 그런 ‘목마름’은 모두의 가슴 속에 이미 숨 쉬고 있는 거겠죠.

다시 고개를 돌렸습니다. 아직도 깃발은 펄럭입니다. 다시 보니 참 강고합니다. 뭐냐고요? 저 빳빳한 깃대 말입니다. 쉬지 않고 펄럭이는 깃발을, 끊임없이 울어대는 깃발을, 깃대는 끝내 놓질 못하는군요. 죽을 힘을 다해 움켜쥐고 있네요. 그래서 깃발은 끊임없이 ‘제자리걸음’만 달리네요.

그게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겠죠. 저 깃대가 바로 ‘나’라는 에고니까요. 나의 집착, 나의 가짐, 나의 욕망이 그렇게 깃발을 움켜쥐고 있는 거죠. 그러나 ‘제자리걸음’으로는 저 푸른 해원을 향해 날아가지 못하죠. ‘나’를 비우고, 비우고, 비워서 깃대의 끈을 끊는 순간, 깃발은 비로소 날아가겠죠. 몸소 저 푸른 해원, 그 청정한 숨결에 가 닿겠죠.

그럼 사람들은 묻겠죠. “대체 ‘저 푸른 해원’이 어디냐”고 말이죠. “거기선 어떻게 숨을 쉬고, 어떤 풍경을 보고, 어떤 생각으로 사느냐”고 말입니다. “에고의 너머에 도대체 무엇이 있느냐”고 말이죠.

과연 어떨까요. 깃대를 떠난 깃발이 해원에 닿는 순간, 어찌 될까요. 해원에 닿은 깃발이 눈을 뜨는 순간, 뭘 보게 될까요. 꿈결 같은 서방정토, 혹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펼쳐질까요?

답은 뜻밖입니다. 눈을 뜨는 순간, 깃발은 여전히 깃대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발견할 뿐이죠. 바람이 부는 대로 여전히 펄럭이고 있는 자신을 볼 뿐입니다. 그럼 사람들은 묻겠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잖아. 똑같이 매여 있잖아. 그런데 왜 수행을 하지? 왜 기도를 하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천만의 말씀이죠. 깃발은 더 이상 ‘예전의 깃발’이 아니죠. 깃발과 깃대는 이제 ‘하나’가 됐으니까요. 그들의 마음은 더 이상 펄럭이지 않게 되죠. 왜냐고요? 깃대에 매달린 이 시간과 이 장소, 바로 ‘지금, 여기’가 ‘저 푸른 해원’이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깃대는 이제 ‘저 푸른 해원’의 삶을 살게 되죠.

이젠 깃대 안에도, 깃대 밖에도 온통 ‘해원’만 차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앉아도, 누워도, 매달려도, 펄럭여도 온통 ‘해원’ 뿐이죠. 이제 깃발은 ‘해원’ 그 자체로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조깅을 하고, 친구를 만나고, 세상을 거닐게 되죠.

만공 스님은 그것(해원)을 꽃에 빗댔습니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말이죠. 삼라만상 모두가 한 송이의 꽃, 한 덩어리의 해원으로 이뤄졌기 때문이죠. 기독교 성서에는 이렇게 표현됐죠.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예수가 사는 것이다(갈라디아서 2장20절).” 무슨 뜻일까요. 바로 ‘깃발과 해원이 하나가 되었으니, 이제 깃발이 사는 것이 아니요, 깃발 안의 ‘저 푸른 해원’이 사는 것이다’라는 말이죠. 그러니 깃발은 이제 ‘깃발의 삶’을 살면서 동시에 ‘해원의 삶’도 살게 되죠.

그러니 어찌할까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만 흔들며 이생을 마칠까요. 아니면 청정함과 자유로움이 넘실대는 ‘저 푸른 해원, 그 자체’로 걸림없이 펄럭이며 살아갈까요.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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