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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루쉰 형제의 絶交 미스터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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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호 38면

1923년 4월 베이징에서 국내외 문인들과 자리를 함께한 저우줘런과 루쉰(앞줄 왼쪽에서 첫째와 둘째). [김명호 제공]

베이징의 북양정부 교육부에 근무하던 루쉰(魯迅·周樹人)은 1919년 전형적인 사합원 한 채를 구입해 고향의 가족들을 올라오게 했다. 루쉰은 중간채에 살았고 모친은 큰며느리 주안(朱安)과 바깥채에 살았다. 큰동생 저우줘런(周作人)과 일본인 부인은 막내 젠런(建人)과 함께 뒤채에 살았다. 저우줘런의 부인은 형제의 일본 유학 시절 하숙집 주인 딸이었다.

중국 신문화 운동의 거성인 이들 형제는 한집에서 별 탈 없이 지냈다. 저우줘런은 베이징대 교수가 됐고 밥도 온 가족이 모여 먹었다. 형제가 벌어오는 돈으로 경제적인 어려움도 없었다. 세 살 터울인 형제는 공원도 같이 산책하고 왕푸징(王府井)의 둥안(東安)시장과 둥자오민샹(東交民巷)의 일본 서점을 늘 함께 다녔다.

그러나 4년 후인 1923년 7월 19일 생각지 않았던 사건이 발생했다. 오전 외출에서 돌아와 쉬고 있던 루쉰에게 안색이 새파래진 저우줘런이 달려와 편지 한 통을 건네주고 휙 돌아서 가 버렸다. “루쉰 선생, 나는 어제야 모든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들을 다시 들춰내 말하고 싶진 않다…. 우리는 모두 가련한 인간들이다. 내가 이전에 꾸었던 장밋빛 꿈은 환상이었다. 지금 겪는 것들이 진정한 인생이다…. 나는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겠다. 이후로는 제발 내 방 근처에 오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씌어 있었다. 형이 아닌 ‘루쉰 선생’이라는 호칭을 썼고 자중(自重)하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절교를 선언하는 편지였다. 루쉰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거절당했다.

다음날 새벽부터 루쉰은 사방으로 집을 보러 다녔다. 밥도 반찬 한 개만 놓고 혼자 먹었다. 책과 비품들은 그대로 둔 채 친구에게 800원을 빌려 마련한 집으로 몸만 빠져나왔다. 저우줘런은 “사람을 보내 물건을 가져가도록 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루쉰은 사람을 시키지 않았다. 10개월 후 직접 갔다. 더 큰일이 벌어졌다.

루쉰이 집 안에 들어서는 것을 본 순간, 방 안에서 번개같이 튀어나온 저우줘런 부부가 루쉰을 향해 귀에 담기 힘든 욕설을 퍼부어 댔다. 동그란 얼굴에 눈은 작고 퉁퉁한 체형의 일본인 제수는 전화통에 대고 친구들에게 “빨리 오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고 저우줘런은 사자 모양의 청동 향로를 루쉰의 머리를 겨냥해 집어던졌다. 다행히 옆에 있던 사람이 저우줘런의 팔을 잡는 바람에 빗나갔다. 1척짜리 청동 향로였다. 루쉰도 도저히 못 참겠는지 도자기로 된 베개를 있는 힘을 다해 저우줘런에게 집어던졌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둘을 가까스로 떼어 놓은 후에야 루쉰은 물건들을 수습해 떠났다. 루쉰은 이날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로부터 12년 후 루쉰은 상하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새벽에 형이 죽었다는 동생의 전보를 받았지만 저우줘런은 평소처럼 학교에 나갔다. 수업이 시작되자 “형님이 세상을 떠나 오늘은 휴강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3년 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저우줘런은 베이징을 떠나지 않았다.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베이징대 문학원장과 교과서 편수위원 등을 지냈다. 일본인 중에는 그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일본이 항복한 뒤 저우줘런은 한간(漢奸·매국노)재판에 회부됐다. 14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보석으로 풀려나 196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인민문학출판사에 근무하며 희랍 신화와 일본 문학작품 등을
번역했다.

이들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두 사람은 평생 일기를 썼지만 저우줘런은 그 부분만 칼로 도려냈다. 루쉰도 간략한 사실만 적어 놓았다. 목욕하는 제수를 창 넘어 구경하다 들켰다는 것에서 시작해 온갖 말이 무성하지만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루쉰이 걸출한 산문가이며 버거운 동생을 뒀던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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