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新택리지] 섬진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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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산.강.들, 그리고 문화유적. 마주 대하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발 딛고 있는 곳의 소중함을, 절실함을. 그래서 week&은 '신정일의 新택리지'코너를 신설해 이번부터 격주 로 싣는다.

신정일(50)씨는 독특한 이력의 문화유산 답사가다. 20년이 넘도록 순전히 두 발에 의지해 전국의 산과 강을 돌아다녔다. 그것도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라 문화유산 답사다. 여태 묻혀 있던 선조의 흔적을 발굴하고 재조명한다. 해질녘 은빛 강물에도 선조의 숨결이 배어 있다고 그는 믿는다. 조선조 이중환의 '택리지'를 본떠 최근 '다시 쓰는 택리지'를 펴냈다.

어느 누가 말했던가. "섬진강(蟾津江)의 봄은 산수유꽃과 매화꽃으로 온다" 고. 그래서 그런가. 매화꽃과 산수유꽃, 그리고 강바람에 흔들거리는 시누대(해장죽.海藏竹)숲으로 섬진강의 봄날은 눈부시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곳이 전남 광양시 다압면 섬진리의 청매실 농원이다. 홍쌍리씨 일가가 이룬 청매실 농원뿐 아니라 강변 마을 전체가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다. 다압면 섬진리에서 하동으로 건너는 길목인 섬진나루의 매화는 봄마다 흐드러진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던 섬진나루는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곳이다. 조선 숙종 31년 통영통제사 오경주가 군사상 요충지라고 조정에 보고하여 별장 한 사람을 두어 지키게 했다. 지금도 섬진리에는 섬진 동헌터가 남아 있고 섬진나루 앞 길가에는 수월정이 있다. 돌 두꺼비 몇 마리가 길손을 맞는 수월정 앞으로 섬진강의 맑은 물이 흐르고 뒤로는 높고 낮은 산들로 둘러싸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섬진강의 오래 전 이름은 모래내 또는 모래가람이었다고 한다. 그 뒤에는 모래가 자꾸 쌓여 다사강(多沙江)이라고도 불렀다. 고려 전기에는 두치강이라고 불리다가 그후 중상류 지역에 민둥산이 많아 여름이면 홍수가 범람하여 붉덩물 투성이라 적강(赤江)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358년 비로소 섬진강이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두꺼비 섬(蟾)자를 써 섬진강으로 불리게 된 연유가 재미있다. 고려 때 어느 여름 장마철이었다. 두꺼비가 줄을 지어 몰려들어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십리를 훨씬 넘긴 두꺼비 떼를 보고서 마을 사람들이 섬진강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고려 우왕 때 왜구가 이 지역에 침입하자 두꺼비들이 몰려들어 시끄럽게 울어댔다. 불길함을 느낀 왜구들이 황급하게 쫓겨 갔다고 하며, 그때부터 사람들은 모래가 많다는 뜻의 다사강 또는 대사강이라는 이름 대신 섬진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본래 섬진강은 남녘에서 낙동강.한강.금강에 이어 넷째로 긴 강이다(길이 212㎞, 유역면적 4896㎢). 그 강물이 섬진강 댐에서 유역 변경을 통해 우리나라 최대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젖줄이 된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남한의 4대 강 속에 영산강(길이 138㎞, 유역면적 2778㎢)이 포함되면서 섬진강은 다섯째 강으로 밀려났다. 이유는 분명치 않다.

왜적에게서 나라를 지켜내고 누대에 걸쳐 민족의 젖줄이 되어 온 강. 그래서 그런지 섬진강은 늙은 어미를 닮았다. 봄날 화사한 산수유와 매화 아래로 흐르는 은빛 강물도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게 다가온다. 특별한 이유없이 4대 강에서 빠진 게 묵묵히 자식의 뒤만 돌보던 어미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무척 아리다. '택리지'가 기록하는 섬진강은 이렇다.

'섬진강 물은 압록진에서 동쪽으로 굽어 흘러 악양강이 되어 남해의 조수와 통하고 지리산 남쪽을 돌아 섬진강이 되어 남해로 들어가는데 섬진강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가 된다'.

신정일 문화유산 답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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