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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대한민국탄생>16.이승만과 3.1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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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3.1운동은 이승만 박사의 생애에 남달리 중요한 의미를 지닌역사적 사건이었다.이를 계기로 그가 일개의 망명객 교육가 입장에서 일약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그는3.1운동을 전후한 시점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 고 있었던가.
1918년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승만은 호놀룰루에서「한인기독학원」일에 주력하고 있었다.그는 세계대전을 마감하는강화회의에서 약소국의 독립문제가 거론될 것을 예상했다.특히 그는 승전국 미국의 대통령이며 민족자결주의를 제창 한 은사(恩師)윌슨이 강화회의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리라 판단하고 이 국제회의에 몸소 참석,윌슨을 설득해 한국 독립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마음먹었다.그는 자기의 계획을 1918년10월께 하와이를 방문한 여운홍(呂運弘)과 미국 선교사 샤록스등을 통해 국내 민족지도자들(송진우.함태영.양전백등)에게 알림으로써 그들이 적시(適時)에 자기의 외교에 호응하는 대중운동을 펼쳐줄 것을 기대했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하와이 교포들은 1918년11월 휴전이 성립되자 그에게 학원일을 접어두고 파리 강화회의에 한인대표로 참석할 것을 강력히 권했다.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서도 1918년12월1일 이승만. 정한경(鄭翰景).민찬호(閔찬鎬)를 파리 강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했다. 이승만은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1919년1월6일 호놀룰루를 출발,미주 본토로 향했다.
1월15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들러 대한인국민회회장 안창호(安昌浩)를 만나 상의한 다음 미국 동부로발길을 재촉했다.그는 뉴욕을 거쳐 2월3일 서재필(徐載弼)이 사는 필라델피아에 당도했다.
필라델피아에서 이승만은 서재필.정한경.장택상(張澤相).민규식(閔奎植)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기탄없는 의견교환을 했다.서재필은 파리 강화회의 참석은 불가능할뿐 아니라 참석한다 해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 못박고 그같은「헛수고 」대신-張.
閔씨등 부호의 협조와 이승만의 모금으로-50만달러의 기금을 조성,영문잡지를 발간함으로써 장기적으로 미국내에서 한국에 유리한여론을 조성하는 일에 힘을 모으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교포들이 자기를 파리 강화회의 대표로 뽑아준 이상 그들이 맡긴 사명을 끝마치기 전에 새로운 일에 착수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잡지발간 계획을 일단 보류하자고 말했다.그 대신 그는 파리 외교를 뒷받침할 한인대회를 필라델피아에서소집,시위를 통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美국민에게 알리자고 했다.서재필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필라델피아를 떠나 워싱턴에 자리잡은 이승만은 파리행 여권취득운동에 박차를 가하면서 잠시 귀국중인 윌슨대통령을 면담하려고 애썼다.2월27일 그는 국무부를 방문해 국무장관 대리 폴크에게파리행 여권을 조속히 발급해줄 것을 요청했다.
폴크는 대통령에게 품신한후 대답해 주겠노라고 약속했는데 윌슨대통령으로부터『이박사가 파리에 오는 것은 유감』이라는 내용의 회답을 받은 다음 3월5일 이승만에게 여권발급 불가 통고를 했다. 이보다 이틀전 이승만은 백악관 비서실장으로부터 윌슨대통령의 면담거절 통보를 받은 바 있었다.
美정부의 이러한 냉대는 이승만이 윌슨家의 막역한 친구로서 윌슨대통령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신화를 여지없이 깨뜨리고말았다. 겹친 과로와 좌절감 때문에 2월초부터 피부병을 앓고 있던 이승만은 드디어 2월하순「워싱턴 요양원」에 입원해 거기에서 집무했다.와병중인 이승만에게 2월25일 정한경이 찾아왔다.
정한경은 대한인국민회측과의 협의를 거쳐『장차 완전한 독립 을 보장하는 조건아래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둠으로써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달라』는 내용의「위임통치안」을 만들어 갖고 와 이를 윌슨을 통해 강화회의에 제출하자고 제의했다.이승만은 이 안에 동의하고 정한경과 나란히 그 문서 에 서명,3월3일 백악관에 제출했다.
3월10일은 궁지에 빠져있는 이승만에게 새 희망을 던져준 뜻깊은 날이었다.그날 그는 서재필로부터 오랫동안 고대했던 소식,즉 국내에서 대규모 항일시위(3.1운동)가 터졌다는 낭보에 접했던 것이다.이 소식은 상하이에 있는 현순(玄楯) 목사가 3월9일 안창호에게 전보로 알렸고,안창호가 이를 서재필에게 통보함으로써 이승만에게 전달됐다.
3.1운동 소식에 접한 이승만은 용기백배해 서재필과 더불어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소집을 서둘렀다.
그 결과 4월14일 미국 독립운동의 요람지 필라델피아 시내 소극장에서 약 1백50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한인대표자대회」(일명 한인 자유대회)가 열렸다.
14일부터 16일까지 연3일 개최된 이 회의의 의장은 서재필이었다. ***워싱턴 자리 앉아 이승만은 이 회의에서「미국에 보내는 호소문」과「(노령)임시정부 지지문」등 주요 문건을 상정,통과시키는데 앞장섰다.회의의 피날레순서는 참가자들이 소극장에서부터 독립기념관까지 시가행진하는 것이었다.유서깊은「독립기념관」에 들어선 이승만 은 1776년 미국 초대대통령 워싱턴이 미국헌법에 서명할 때 사용했던 책상앞에 앉아 기념촬영을 했다.이어 그는「3.1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대한공화국 만세!』와『미국만세!』를 선창했다.만세 삼창 소리가 독립기념관에 울려퍼지는 순 간 이승만을 한동안 괴롭혔던 병마는 달아나고 이승만은의기충천(意氣衝天)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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