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문화사절의 舌禍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5면

지난 7일 오후(이하 한국시간) 서울팝스오케스트라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로스앤젤레스(LA)의 한인 동포가 올린 글이 떴다. 미국 순회공연 중인 서울팝스의 단장 겸 상임지휘자 하성호씨의 LA 공연 발언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이 최고다. 한국은 50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

'한국 비하' 발언은 금방 국내의 인터넷 포털사이트 유머게시판에 퍼올려졌고, 순식간에 비난 여론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9일부터는 미국에 있던 하씨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앞으로 남은 일정은 결코 우리나라의 자존심과 자부심에 흠이 없는 멘트로 국위 선양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9일 오전 9시)

"애국적인 충정에서 순회공연에 임했습니다. 한국을 비하하려 한 뜻이었다는 비난은 억울합니다. "(오전 10시30분)

"콘서트에 와주신 여러분의 호응에 힘입어…청중에게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이 앞선 탓에 일어난 일입니다. 표현력 부족과 잘못된 단어 선택으로 한국을 비하하게 된 점에 대해 백번 사죄하며 깊이 자중하도록 하겠습니다."(오후 3시27분)

"사죄하는 마음으로 지휘봉을 부지휘자에게 넘기도록 하겠습니다."(오후 5시20분)

하성호씨가 언론사 음악담당 기자들 앞으로 보낸 '사과문'이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처음엔 "억울하다"고 했다가 일파만파로 사태가 번지자 반성의 수위를 높여간 것이다.

하씨가 뒤늦게나마 순회공연 도중 지휘봉을 꺾으면서까지 자숙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청중의 호응에 보답하는 뜻에서 그런 말을 했다'는 당초의 해명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개운치 않다. 청중의 호응을 유도하기 위해 '가벼운 아부'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정도 문제 아닐까.

이번 행사에 국고와 민간기업 협찬을 포함해 11억원이나 지원된 것은 '문화사절'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대에서의 사소한 코멘트조차 콘티에

포함시킬 정도로 치밀한 준비와 리허설을 거쳤어야 했다. 하씨는 무대를 너무 가볍게 봤다.

이장직 음악전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