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축구] 남자들과 경기 땐 ‘지기 싫다’ 오기 샘솟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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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소연이 축구공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15세 때 최연소 여자축구 대표선수가 된 지소연은 이문초등학교 시절 남자 팀에서 알아주던 실력자였다. [사진=장치혁 기자]

여자축구 최연소 국가대표 지소연(17·동산정보산업고)은 며칠 전 ‘그레이시 스토리’라는 영화 벽보 앞에서 한동안 멈춰섰다.

영화 ‘우생순’을 보며 ‘같은 비인기 종목인데 핸드볼 영화는 있고 왜 여자축구는 없을까’라고 생각했던 게 떠올라서다.

나중에 이 영화가 미국 여자축구 선수가 남자팀에서 역경을 딛고 성장해 가는 과정을 다뤘다는 걸 알고 더욱 친근함을 느꼈다. ‘그레이시 스토리’는 어릴 때 남자축구팀에서 뛰었던 미국 여배우 엘리자베스 슈의 실제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영화다. 축구선수인 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접한 동생이 오빠가 뛰던 팀에서 축구를 시작해 주위의 편견을 이겨내는 과정을 담았다.

지소연은 2006년 피스퀸컵 국제축구대회에 만 15세 나이로 출전했다. 한국 축구 사상 남녀 통틀어 최연소 A매치 출전 기록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남자축구팀 선수로 맹활약했다. 여자 선수가 남자팀에서 축구를 시작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지소연의 어린 시절은 독보적이었다. 인형놀이보다 총싸움을 더 좋아했던 소연이는 서울 이문동에서 꼬맹이 축구판을 휩쓸던 실력파였다. 이문초 축구부 코치가 소연이를 2학년 때 팀으로 끌어들였다. 여자라는 차별은 없었다. 또래 남자보다 20cm 이상 작았지만 개인기와 패싱 능력은 학교 최고였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그것도 남자팀에서 무슨 축구냐’는 소리가 듣기 싫어 개인훈련에 매달렸던 덕분이었다.

여자에 대한 편견은 밖에서 찾아왔다. 대회에서 지소연의 개인기에 농락당한 상대팀 선수들이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거칠게 나온 것이었다. 경기 도중 심한 욕설을 듣는 일도 다반사였고 ‘하리수’라고 놀려대기도 했다.

하지만 당돌한 소연이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실력으로 안 되니 질투가 나 그랬던 것 같다.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남자 선수들과 겨루기가 쉽지 않아졌다. 주력이나 몸싸움에서 더 이상 경쟁할 수 없게 됐다. “그때는 상대도 안 되던 친구들이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리는 지소연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묻어나지만 여전히 남자들과 대결할 때는 승부욕이 샘솟는다. 여자축구팀은 상대를 구하기 어려울 때나 특별한 훈련이 필요할 때 서너 살 어린 남자팀과 연습경기를 한다. 지소연은 “남자들과 하면 확실히 몸싸움이나 스피드에서 떨어진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고, 이겨보고 싶다는 의욕이 생긴다”고 말했다.

24일부터 태국에서 열리는 아시안컵 예선전에 나서는 여자축구 대표팀은 19일 출국에 앞서 이 영화 시사회에 참석한다. 다들 정도는 다르지만 지소연과 비슷했던 옛 추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허벅지 부상으로 이번 대표팀에서 나와 있는 지소연도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장치혁 기자

◇‘그레이시 스토리’는=오빠가 교통사고로 죽자 주인공(그레이시)이 오빠를 대신해 축구팀에 가입해 편견과 역경을 딛고 오빠가 못다한 꿈을 이루면서 갈등과 실의에 빠졌던 가정도 회복된다는 내용이다. 주인공의 어머니로 출연한 엘리자베스 슈는 아홉 살부터 4년간 남자축구팀에서 뛰었고, 동생 앤드루도 LA 갤럭시에서 활약했던 프로 선수였다. 27일 국내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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