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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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올라올 때는 잘 몰랐는 데 저 아래는 무시무시하게 멀어 보였다. 『밑을 보지 말고 저 멀리를 봐.잘못하면 자기도 모르게 뛰어내리니까…사람은 죽음의 본능이라는 게 있어서 순간적으로 죽음을 선택하게 돼.』 임희경은 그의 말대로 눈을 들어 먼 곳을바라봤다.그러자 한강은 평소의 한강처럼 평화롭게 흘러갔다.거지는 푸른 비닐을 희경의 앞까지 다독거려줬다.아치 위는 보기보다는 넓어 앉을만 했다.그리고 주위를 둘러싼 푸른 비닐이 주변 시야를 막아주고 있어 그런대로 안전감이 있었다.
『죽음의 본능도 다 알아요?』 『상담하려면 그 정도 기본적인지식은 갖고 있어야지.타나토스(thanatos)! 인간에게는 누구나 무생물로 돌아가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이 있다.』 임희경은 정말 이 거지와 상담이라도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알 수 없는 괴짜지만 기왕 죽을 거 한번 실컷 떠들어 보고 가는 것이다.괜히 죽은 다음에 무당 불러다가 뒤늦게 한풀이하지 말고…. 그래서 희경은 정민수와 자기의 얘기를 꺼냈다.의과대학시절처음 만났을 때부터 가고 난 지금까지를….거지는 의외로 진지하게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그리고 정말 상담하는 사람처럼 적절하게 반응을 해주었다.콧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끄 덕이는 게영락없는 정신과 의사였다.
희경은 그렇게 상담하는 정민수를 많이 봐왔기 때문에 가끔씩 웃음이 터져나왔지만 억지로 참고 마지막을 맺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예요….』 거지가 다시 「흥」하고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품에서 소주를 한병 꺼냈다. 『역시 그 분의 부인이었구만! 내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지…내 당신을 보는 순간 그 사람이 떠올랐어.』 임희경은 깜짝 놀라 물었다.
『그사람을 알아요?』 『알다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소주를 두병이나 깠는데….』 『그이도 이리로 올라왔나요?』 『고수부지에서 뛰어들려고 하길래 구질구질하게 죽지 말고 신바람나게 죽으라고 이리로 데리고 왔지.그사람 수영 참 잘하더구만.여기서 강바닥까지 다이빙했는 데도 한참 허우적거리다가 꼴깍 갔어….』 희경은 갑자기 눈이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그이가 바로 이 자리에서 죽다니….자기가 앉아있는 바로 이자리에서….희경은 갑자기 머리가 멍해지면서 어지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으면 어김없이 눈이 돌아가고 거품을 뿜으 며 쓰러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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