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행복지수 높이기] 8. '교환일기' 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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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미씨가 첫째딸 선영이와 교환일기를 읽는 동안 남편 동원봉씨는 세 딸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임현동 기자]

'엄마! 엄마가 은선이랑 영은이를 더 예뻐하시는 것 같아 일부러 말을 안 들었어요. 그러면 엄마의 관심을 더 많이 끌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선영아, 때때로 엄마가 인내심이 부족해서 너의 마음을 잘 헤아려주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단다. 하지만 그런 실수들 속에서도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지.'(큰딸과의 교환일기 중에서)

서울 동부이촌동에 사는 최경미(38)씨는 첫째딸 선영이(10)와 4년째 '교환일기'를 주고받고 있다.

재미동포인 남편 동원봉(40.사업)씨와 1993년 결혼, 미국에서 살다 지난해 귀국한 최씨는 네 딸의 엄마다. 남편 회사일도 함께하면서 열살부터 네살까지 각각 두살 터울인 네 아이를 키우느라 늘 시간이 부족했다. '아이와 1대 1의 개별적인 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최씨는 교환일기를 시작했다. 하드커버 일기장을 마련해 두 사람이 번갈아 일기를 썼다. 엄마와 딸 사이의 일기 대화는 일주일에 두세번씩 오고갔다.

선영이는 "시간이 없어 일일이 얘기하기 힘들었던 학교생활이나 친구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일기에 자세히 적을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일기에 적은 내용을 근거로 절대 혼을 내지 않겠다고 아이와 미리 약속도 했다. 한번은 동생과 싸우다 야단을 맞은 선영이가 그날 일기에 '아까는 잘못했다고 말하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분하다'고 적었다. 이에 대해 최씨는 '야단을 맞고 마음이 상한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며 일기로 딸을 다독였다.

"아이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통로를 열었다는 것이 교환일기의 가장 큰 효과"라는 최씨는 지난해부터 둘째딸 은선이(8)와도 교환일기를 시작했다. 최씨는 "앞으로 네 아이와 각각 주고받는 교환일기를 모아 결혼할 때 선물로 줄 생각"이라고 말한다.

최씨집에서 교환일기를 처음 도입한 사람은 사실 남편 동씨다. 2000년 넷째 아이를 낳은 최씨가 산후우울증을 호되게 겪었을 때였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일상이 힘겨웠다.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건너가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과정에서 가슴에 응어리진 서운함도 꽤 쌓였다. 자기 계발은 물론이고 좋은 엄마나 아내와도 거리가 먼 것 같았다. 남편에게 하소연했지만 건성으로 듣는 듯했다.

남편 동씨는 "분명히 열심히 듣고 있는데도 아내는 딴생각하면서 듣는 것 같다고 화를 내더라"며 "억울한 생각에 교환일기를 제안했다"고 말했다.

동씨가 사다준 무지개 색깔의 일기장에 최씨는 그동안 쌓였던 서운함을 쏟아냈다.'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봤냐'며 조목조목 설명하는 최씨의 일기 뒤로 동씨는 이런 답을 남겼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는데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구나. 당신과 나의 감정이 같은 방향으로 가기 위해선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 무엇보다 내가 먼저 변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 뒤 반년 동안 교환일기를 주고받았던 두 사람은 자식 넷을 낳으면서도 몰랐던 서로의 속마음을 알게 됐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나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으니까 아내도 그렇게 받아들일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나와 아내가 다를 수 있다고 인정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동씨는 "감정에 휘둘리기 쉬운 말보다 생각을 정리해 쓰는 글이 오해를 불러올 위험이 적었다"며 교환일기의 효과를 전했다. "미안하다""고맙다"는 말도 목소리로 전할 때는 '인사'로 취급받았지만 글로 표현하니 감동으로 남았다.

"요즘도 남편이 미워지려고 할 때마다 다시 꺼내보며 마음을 다스린다"는 최씨는 "교환일기 한장 한장이 행복을 엮어가는 씨실과 날실 같다"고 말한다.

이지영 기자<jylee@joongang.co.kr>
사진=임현동 기자 <hyundong3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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