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색이 넘실대는 카리브 … 남미는 내게 황홀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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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그는 늘 길 위에 있었다. 서울대 동양화과 김병종(55) 교수 말이다. 1980년대 ‘바보 예수’ 연작을 통해 구도자(求道者)에게 길을 물었고,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경을 헤매고 살아난 89년부터 매달린 ‘생명의 노래’ 연작에선 물고기·새·말·사람을 길동무 삼았다. 예인(藝人)들의 자취를 좇아 국내외를 돌아다니며 쓰고 그린 『화첩기행』 다섯 권 시리즈는 이 시대 선비 화가의 문자향을 제대로 보여줬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3년 만에 여는 개인전 ‘길 위에서’는 김 교수가 이 같은 여행에 ‘같이 가자’고 손짓하는 전시다. 하루에 열 두 번씩 빛깔이 변한다는 카리브 해변에서 벌거 벗은 아이들과 노닥거리고, 화려한 원색 옷 입고 시거 물고 있는 쿠바 여인들을 선망하고, 탱고의 발상지인 라 보카 지구에서 몸 푸는 여정이다.

동양화에서 출발한 그가 ‘다 벗어 던졌다’. 종이를 손으로 이겨 만든 부조, 사각틀을 벗고 맘대로 오린 종이 위에 먹과 아크릴로 맘껏 원색을 펼쳤다. 80여 점 그림 속에 중남미에서 받은 미술의 충격이 그대로 담겼다. 그 충격은 바로 일상 속 거리낌 없는 색채였다. 그는 “남미는 내게 황홀의 덩어리였고 색채의 교사, 불멸의 정신이었고 영혼의 땅이었다”고 말한다.

“컴맹이라 인터넷을 못한다”는 그다. 자료 수집을 못해 선입관이 없었고, 무거운 노트북 컴퓨터 지고 다니는 대신 붓펜과 작은 스케치북 들고 다니며 본 것들을 스케치했다.

‘바보 예수’ 10년, ‘생명의 노래’ 10년에 이어 ‘길 위에서’ 연작을 시작하는 그는 또 다른 10년을 내다보고 있다. 김교수는 “앞으로도 계속 예술을 화두 삼아 떠돌아다니며 글과 그림에 인문학적 성찰을 담아내고 싶다”고 말했다.

“길 위에 서 있는 동안 내게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다.” 전시장 입구에서 작별하면서 그가 들려준 말이다. 체 게바라의 일생을 그린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의 마지막 대사란다. 여행은 12일부터 26일까지다. 02-734-6111.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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