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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디터칼럼

아름다운 하산을 막지 마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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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권력도 다르지 않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스스로 단임이라는 굴레를 만들었다. 정통성 없는 권력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래선지 임기 말에는 다른 꿈을 꾸었다. 권력을 놓기 싫었던 것이다. 내각제 개헌을 도모하고,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상왕전을 만들었다. 대통령을 다시 할 순 없지만 집권당을 통해, 또 상왕이 되어 절대권력을 놓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건 백담사와 청문회, 서울구치소였다. 평생 자신의 2인자였던, 가장 만만한 친구를 후임자로 앉혔지만 소용없었다.

 권력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것은 우리만이 아닌 모양이다. 세계를 둘러보면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권력자가 한둘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독재자를 말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의 옷을 입고도 그렇다. 아르헨티나의 페르난데스 부부 대통령은 그래도 애교스럽다. 연임을 금지한 헌법을 피해 부부가 대통령 자리를 교대했다. 그렇게 계속 집권하겠다는 거다. 그건 헌법의 정신에 맞는 일일까.

아프리카 케냐에서는 선거 결과를 깔아뭉개고 권력을 유지했다. 지난 연말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개표 초반부터 야당 후보(라일라 오딩가)가 현 대통령(음와이 키바키)을 앞섰다. 그러나 개표는 중단되고, TV중계도 금지됐다. 이틀 뒤 선관위는 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런 터무니없는 결과를 놓고 종족분쟁이 벌어졌다. 1500명 이상이 숨지고, 60만 명 이상이 집을 떠나 난민이 됐다.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까지 나서 겨우 타협한 것이 야당 후보에게 총리직을 주는 것이다. 결국 키바키는 국민의 피를 담보로 억지를 부려 대통령 자리는 지킨 셈이다.

또 하나의 다른 실험이 이뤄지고 있다. 메드베데프 제1부총리에게 권력을 넘긴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다. 메드베데프가 취임하면 푸틴은 총리를 맡겠다고 한다. 심복인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에 앉혀 놓고 권력은 자신이 계속 휘두르겠다는 것이다. 결국 하늘에 해가 두 개 떠 있는 꼴이다. 궁금한 것은 선출된 권력인 메드베데프가 순순히 허수아비 역할에 만족할까 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전통은 절대권력이다. 차르가 그랬고, 스탈린 등 공산 정권이 그러했다. 절대권력이 무너지고 집단지도체제로 바뀌었다가도 어느 틈에 새로운 절대 권력자가 등장했다. 그렇다면 푸틴의 미래는 어떨까. 전 전 대통령의 길을 따라 걷게 되지는 않을까.

때로는 권력자가 산을 내려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주변의 욕심일 때가 있다. 통합민주당에서는 공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박재승 공천심사위원장은 쟁쟁한 실력자들을 줄줄이 탈락시켰다. 비리에 연루돼 금고 이상의 형을 받았다는 게 이유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과 최측근까지 밀어냈다. 호남에서는 30% 이상 물갈이하겠다고 한다. 88.5%의 국민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본지 3월 7일자 1, 4면). 일부에서는 정치를 모르는 아마추어가 일을 망치고 있다고 반발한다. 김 전 대통령의 영향력은 아직도 막강하다. 고정 지지자들만 뭉쳐 딴살림을 차려도 민주당은 껍데기만 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역의 한계에 평생 고통을 겪어온 김 전 대통령이 아직도 야당에 자신의 이름표를 붙여야 한다고 생각할까. 측근이나 아들만이 정치적 업적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할까. 김 전 대통령은 과거 수없이 대리인을 내세운 경험이 있다. 하지만 유권자는 메드베데프 뒤에 푸틴이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니다. 큰 나무의 그늘은 작은 나무를 모두 죽였다. 눈치만 보다 고정표마저 챙기지 못한 지난 대선도 결국 그런 흐름을 벗어나지 못했다. 당사자들은 오죽 할 말이 많겠는가. 그렇더라도 하산하는 전직 대통령의 바짓가랑이만은 그만 놓아주었으면 싶다.

김진국 정치·국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