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영국 왕실이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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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영국의 해리 왕자가 아프가니스탄 교전 지역에서 10주간 근무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영국 왕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 실천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왕위 계승 서열 3위인 그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최전선 복무를 자원한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이 여전히 굳건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해리 왕자는 “군인으로서 국가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일을 할 뿐”이라고 자신을 낮췄다. 고든 브라운 총리는 “해리 왕자와 다른 모든 영국 군인들의 헌신과 봉사에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고 말했다. 모병제인 국가에서 왕실 사람들이 자청해 군에 입대하고, 국가는 이들의 노고에 보답하려고 애쓴다. 제대로 된 선진국의 전형이다.

어느 국가가 건강한 사회인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이행에 달려 있다. 권력과 부를 갖고 있는 지도층이 그에 따른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공헌을 하는 사회에는 갈등이 생길 수 없다. 특히 이는 병역 문제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병역은 사회 지도층이 향유하는 것들을 지켜 주는 방패막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 수준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병역비리만 터지면 이들이 연관돼 있다. 병역특례를 악용해 군에 안 간 사람들을 보면 정치인·고위 공직자·기업인·교수 등의 아들이거나 유명 연예인·운동선수들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명박 정부의 남자 장관 14명 중 5명이 병역 면제를 받은 것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물론 ‘적법한 절차에 의해 병역 면제를 받았으니 문제가 안 된다’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고위 공직자나 정치인과 가족의 이력이 발표될 때마다 평균 병역 면제율이 일반 국민의 면제율(최근 10년간 평균 4.1%)을 훨씬 웃도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가능한 한 군대에 가지 않으려는 분위기에 휩싸인 사회는 정상이 아니다. “군 복무를 영광으로 아는 사회를 만들 것”이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약속이 이행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