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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6. 어머니의 믿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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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8군 쇼를 하러 부산 인근 미군 부대에 다녀오는 길. 해변가에서 포즈를 취했다.

베니 김의 발탁으로 화양연예주식회사 최고의 쇼인 ‘베니 김 쇼’의 견습 단원이 됐지만 이를 공공연히 알리고 다닐 상황은 못되었다. 특히 아버지나 큰오빠가 알게 되는 날에는 불호령에 금족령이 떨어질 게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세상도 많이 바뀌었고, 너나 할 것 없이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라 가문을 운운할 때는 아니었지만 “전주 김씨 뼈대 있는 양반가문의 후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라지 않았던가.

고민 끝에 어머니와 큰언니에게 사실을 알렸다. 큰언니는 짐짓 놀라는 기색이었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야지. 혜자야, 나는 내 딸을 믿는다. ”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그 자리에서 머리라도 깎일 각오로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는데, 뜻밖에도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낸 것이다. 나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듯 한 기분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이른바 신여성이었다. 해방 전에는 인력거를 불러 타고 가부키 공연을 보러 】챰竪?했다는데, 당시 여염집 부인으로서는 선뜻 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상당히 멋을 부리셨다. 옷고름 대신 브로치를 단 저고리를 즐겨 입으셨고, 그때마다 브로치와 반지는 반드시 한 세트가 되어야 했다. 진주 브로치를 달았으면 진주 반지를, 비취 브로치를 달았으면 반드시 비취 반지를 끼셨다.

그러고 보면 나 역시 어머니로부터 그 기질을 물려받은 것 같다. 나는 공연을 위한 의상을 고를 때도 꽤나 꼼꼼하고 까다로운 편이지만 패션은 작은 액세서리 하나, 구두 코끝 그리고 손톱 끝까지 완벽한 미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어머니만의 암묵적인 동의였지만 집안의 허락을 받고 나는 날마다 화양연예주식회사로 출근을 했다. 딱히 하는 일도 없었고, 월급도 없었지만 이미 가수가 될 꿈으로 부푼 가슴은 금세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주말이 되면 다른 단원들과 함께 공연장에 갔다. 파주·문산·오산·수원 등 미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로든 갔다. 사회자·가수·무용수·밴드를 포함해 서른 명 정도가 한 단체를 이뤄 움직였는데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교통수단은 주로 미8군 부대에서 내주는 군용트럭이었다. 가끔은 운 좋게 버스가 배정될 때도 있었는데, 그런 날은 마치 리무진이라도 배정된 듯 단원들이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보다 훨씬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던 데다가 미군 부대가 있는 외진 곳까지 트럭을 타고 들어가다 보면 별의별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졌다.

특히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달릴 때가 문제였다. 엉덩이를 자리에 붙이고 있을 새가 없었다. 몸이 위로 튕겨 올라 정수리가 트럭 지붕에 닿기 일쑤였는데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면 혼이 쏙 빠질 지경이었다. 또 앞차가 내뿜는 모래먼지에 머리카락과 눈썹이 새하얗게 변했다. 바람과 먼지를 조금이라도 피해보겠다고 남녀 할 것 없이 머리에 스카프를 썼지만 그 틈으로 나온 머리카락과 눈썹에 새하얗게 모래 먼지가 앉은 채 트럭에서 내리는 서로의 모습을 보고는 뭐가 그렇게 우스웠던지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었다. 그나마 날씨가 따뜻하면 다행이지만 날씨마저 춥고 바람이 거센 날이면 영락없이 거지꼴을 하고 부대에 도착했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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