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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길 떠나는 시 ⑦ 『낙타』 신경림 시집, 창비

중앙일보

입력

낙타의 길과 낙타의 욕망 혹은 나의 욕망

신경림 신작 시집 『낙타』에는 이른바 여행시들이 많이 담겨있다. 시인의 떠돎이 시집의 주요한 자양이 되고 있는 셈이다. 시인이 한때 몸과 마음을 부려 시를 낳은 곳들은 북한과 터키, 네팔, 콜롬비아, 미국, 프랑스, 몽골 등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여행 혹은 떠돎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걷는 것이다. 신경림은 시집 1부에서 삶과 죽음의 아득한 경계를 집중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고희를 넘긴 시인의 시집이어서 그럴까? 아니면 시의 길을 걷고 또 걷다보면 이르게 되는 시의 마지막 지점이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여서일까?
시인은 죽음을 대하는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무엇보다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시인에게 죽음은 일종의 필사적인 탈출이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나갈 테다
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 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 한갓 눈물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었다 해도
-<눈> 전문

이 시에서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단어는 “전속력”이다. 죽음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나”가겠다는 의지와 선언은 참으로 놀랍다. 삶의 무엇이 그토록 죽음에 대한 기꺼운 투신을 만들어낸 것일까? “전속력”은 죽음에 대한 지극한 수용을 넘어 죽음에 대한 강박-타나토스Thanatos-곧 과잉이 아닐까? 반면 삶-에로스Eros-에 대한 회한은 전혀 없는 것일까? 지상의 삶에 대한, 인간적인 아주 인간적인 풍경은 정녕 없는 것일까?

에머랄드 깔린 대로는 아닐 거야,
장미로 덮인 꽃길도 아니겠지,
진탕도 있고 먼지도 이는 길을
이 세상에서처럼 터덜터덜 걸어가겠지,
두런두런 사람들 지껄이는 소리 들리고
굴비 굽는 비릿한 냄새 풍기는 골목을.
잊었을 거야 이 세상에서의 일은,
먹다 남은 배낭 속 반병의 술까지도.
무언가 조금은 슬픈 생각에 잠겨서,
또 조금은 즐거운 생각에 잠겨서,
조금은 지쳐서 이 세상에서처럼.
-<먹다 남은 배낭 속 반병의 술까지도> 전문

저승길은 삶의 길과 하등 다를 바 없다. 저승길은 보석과 꽃의 길이 아니라 “진탕도 있고 먼지도 이는 길"일 뿐이다. 사람들이 주인인 비릿한 냄새 풍기는 골목을 지나쳐야만 하는 길이다. 떠나는 자의 마음 역시 그렇다. 삶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슬프고도 즐겁게, 그리고 조금은 지친 마음으로 떠나는 것이다. 결국 저승길은 새로운 길이 아니다. 현실의 또 다른 길일뿐이다. 저승길을 걸어야만 할 많은 길 중의 하나일 뿐이다.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죽음은 삶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라. 과연 그렇게 말하기가 어디 쉬운가. 말하거나 듣기는 쉬워도 정작 온 몸과 마음으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시인 역시 위 시에 많은 쉼표들을 의도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힘겨움을 짐짓 드러낸다. “전속력”과 쉼표, 그 사이에 시인은, 당분간, 있다. 왜 당분간이냐 하면 시인은 그 잠깐의 유예를 완벽하게 해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제작이자 서시(序詩)로 실린 시 <낙타>가 바로 그 증거이다. <낙타>에서 시인은 삶과 죽음에 대해 그 어떤 넘침도 모자람도 없어 보인다.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낙타> 전문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한 장면

이 시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시적 장치는 낙타를 둘러싼 시인의 태도다. 시인은 처음에는 저승길을 낙타를 타고 가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만약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온다면 낙타가 되어 오겠다고 희망한다. 그리고 다시 저승으로 갈 때에는 그 낙타에 누군가를 태워 오겠다고 말한다. 이처럼 시인에게 있어 낙타는 죽음을 벗하는 가장 완벽한 상징물인 셈이다. 그렇다면 정작 낙타는 어떤 존재인가? 그 어떤 휘황한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이기에 이토록 황홀한 지위를 누리는 것일까? 사막의 고독한 순례자 혹은 그 동반자? 우리의 시인은 낙타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그 어떤 존재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평생 시골에서 농사만 짓던 농부’와 같은 의미의 표현인 것일까? 곧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힘껏 살았다는 의미인 것일까? 허황된 꿈과 욕망이 아니라 주어진 운명에 충실한 삶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러하리라.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자 “가장 가엾은 사람”이 바로 “낙타”인 것이다. 시인이 저승길에 오르며 낙타를 타고 싶다는 것은 그 같은 삶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낙타가 되고 싶다는 것은 그 같은 삶을 살수만 있다면 다시 살고 싶다는 희망이며, 그 같은 삶을 산 사람을 등에 태우고 싶다는 것은 그 삶에 대한 조용한 권유이다. ‘낙타=농부’의 삶을 살 때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한 넘침과 모자람에서 벗어나게 된다. 조금 다른 말로 해본다면, 지극한 하나의 떠돎은 모든 요란하고도 헛된 떠돎을 무화시킨다. 떠나지 않는 것이 가장 멀리 떠나는 것이라는 모순의 진실 혹은 역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아직 가야할 길,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많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낙타, 그 자신의 욕망은 과연 없을까? 일생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는 과연 다른 별과 달과 해와 모래를 꿈꾸지는 않을까? 아예 일탈을 꿈꾸지는 않을까? 낙타는 혹시 바람이 되고 싶거나 저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는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가 되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 누가 알랴! 하지만 내 마음과 달리, 머리는 이미 알고 있다. 바로 죽음이 그 대답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곧 “죽음을 기억하라!”는 저 희랍의 경구가 바로 그것이다.
하여 나는 또 생각한다. 내 욕망과 내 머리가 서로 싸운다는 것은, 내가 적어도 내 삶의 길의 반환점 근처에 이르렀다고. 질풍노도Strum und Drang에는 머리Cogito가 없다. 머리가 움직이면 속도는 준다. 질풍노도와 머리는 같은 마차에 속한 두 바퀴가 아니다. 그 둘은 각기 다른 마차의 바퀴들이다. 바퀴가 다르면 다른 마차인 것이다. 이제 어떤 마차에 올라타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마차에서 언제 내려 나만의 낙타를 타게 될 것인가? 오늘도 나의 마차는 어딘가에서 덜컹거린다.

글_ 북리뷰어 김용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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