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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필 평양 공연에 숨겨진 코드] ② 줄줄이 깬 '금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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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뉴욕필)의 이번 평양 공연에선 주목할 만한 코드가 여럿 보인다. ‘미국적인 것’과 ‘금기 깨기’가 대표적이다. ‘싱송(sing-song)외교’의 숨은 의도는 연주 곡목 선정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번 평양 공연에 숨겨진 코드를 소개한다.

◇금기, 줄줄이 깨지다=뉴욕 필이 첫 북한 공연에서 미국 국가를 연주한 것도 그렇지만, 바그너를 연주한 것도 ‘금기 깨기’에 해당한다.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는 생전에 쓴 ‘음악에서의 유대성’이라는 글에서 당대 유대계 독일 작곡가인 펠릭스 멘델스존과 자코모 마이어베어를 ‘독일 문화에 해로운 외래 요소“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유대인 친구, 동료, 지원자 등과 친하게 지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반유대주의를 이유로 바그너를 좋아했다. 고대 게르만 영웅이 등장하고 독일 민족주의를 고무하는 바그너의 악극들을 즐겨 들었다. 이 때문에 나치 시기 독일에서 바그너의 음악은 그야말로 친위 음악으로 간주됐을 정도다. 아리안족 영웅이 나오는 ‘지그프리트의 목가’ 등의 곡이 나치 행사에서 연주됐다. 수용소에선 스피커로 바그너의 음악을 틀었으며 끌려간 유대인 음악가들에게 강제로 연주하게 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을 한 유대인 수용소 생존자들은 2차 대전 이후 바그너의 음악이라면 치를 떨었다. 바그너 악극 ‘파르시팔’이 2차 대전 발발 직후 ‘반전을 조장할 수 있다’는 이유로 나치 선전상 조세프 괴벨스에 의해 공연이 금지되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지만 이런 점은 무시됐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바그너는 사실상 터부가 됐다.

물론 이스라엘에서도 음반 가게에서는 아무 문제없이 팔리고 있으며, 국영 방송에서도 바그너의 곡이 나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공연장을 비롯한 공공장소 연주는 수용소 생존자 등의 반대로 오랫동안 이뤄지지 못했다.

이런 금기는 2001년 7월 유대인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에 의해 깨졌다.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베를린슈타츠카펠레(베를린 국립가극장관현악단)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페스티발’이라는 공연장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한 부분을 연주한 것이다. 바렌보임은 “바그너에게 반유대 정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이는 끔찍한 일”이라면서도 “하지만 바그너가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부른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음악은 음악이고, 정치는 정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금기는 올바른 게 아니라고 지적했다. 바렌보임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상호 이해를 강조하며 음악을 통한 교류 활동을 강조하고 있다.

◇평양에 울려 퍼진 자유도시 부르주아 시대 개막곡= 동평양 극장 공연 다음 날인 28일 뉴욕필은 북한 조선국립교향악단과 멘델스존의 현악8중주곡을 협연했다. 독일의 '제국자유도시' 함부르크의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난 멘델스존(1809~1847)은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의, 자본주의에 의한 의한, 자본주의를 위한’ 부르주아 작곡가였다. 아버지 아브라함은 부유한 은행가였고 할아버지 모세는 당대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였다.

그는 ‘행운아’를 의미하는 ‘펠릭스’란 이름의 의미에 걸맞게 행복한 일생을 보냈다.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는 전속 악단을 보유했을 정도다. 그보다 유복하게 음악을 한 사람은 없다고 할 정도로 그는 좋은 조건에서 음악활동을 했다. 그런 그의 삶은 그의 밝고 맑은 선율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함부르크가 제국자유도시라는 것은 귀족 영주가 아닌 시민이 자치를 하면서 민주주의를 누렸다는 뜻이다. 은행가, 상인 등 부르주아 계층은 시장경제를 운영하면서 정치권력까지 향유했다. 음악가들도 귀족 대신 부르주아를 위해 작곡하고 연주했다.

그것이 교회 소속 음악가인 바흐, 에스테르하치 공작 가문에서 하인 복장을 하고 음악을 만들었던 하이든, 떠돌이 모차르트, 불우한 베토벤 등 고전파 작곡가와 판이하게 다른 점이다. 멘델스존이 낭만파 시대를 연 것도 이 같은 산업과 자본주의의 발전과 무관하지 않다. 귀족의 세상은 가고 자본가의 시대가 열리는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멘델스존은 그런 세대의 첫 음악가랄 수 있다. 멘델스존의 음악은 변혁의 신호탄이었다.

뉴욕필의 평양 공연에서 바그너, 드보르작, 멘델스존 등의 곡이 선택된 것은 우연의 일치 였을까. 아니면 북한에 미국 문화와 민주주의, 그리고 시장경제를 전파하고 싶다는 의도가 담긴 것 일까. 아니면 ‘음악 앞에 정치적 이념일랑 묻어두자’는 메시지였을 수도 있다. 음악은 음악으로 들어야 한다. 하지만 선곡에 담긴 우연치않은 은유를 가볍게 지나칠 수만도 없는 것이 오늘의 북미관계다.

김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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