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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장편 성장소설 "세월" 출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6면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몇 년 전 이 물음을 제목으로 내건 드라마가 있었다.이 드라마는 방영 당시 장안의 화젯거리가 됐을 뿐만 아니라 올해초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연극공연장 역시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여성들로 붐볐 다.
반응은 대체로 이랬다.여성드라마의 홍수 속에서 야단스럽지 않으면서도 여성적 삶의 핵심을 제대로 그려 낸 첫 여성성장 드라마라는 것.
소설에서도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단골주제다.동시에 페미니즘 시장이 넓은 국내출판계에서는 경쟁력 있는 메뉴다.때문에많은 작가들이 비슷한 목소리로 페미니즘을 노래한다.
그러나 지난해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로 고료 1억원의 국민일보 문학상을 수상한 김형경(34)씨가 전작장편 『세월』(전3권.문학동네)에서 부르는 노래는 좀 다르게 들린다.단선적인 여성주의의 시각을 넘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기저음이 더 강하게 울린다.
이 기저음을 배경으로 김씨가 그려 내는 주인공의 성장사는 부모의 별거와 애인의 배신으로 이어지는 드라마 『여자는 무엇으로사는가』의 줄거리와 비슷하다.그러나 이야기의 강도가 다르다.김씨는 여성작가들이 감히 꺼내지 못했던 민감한 이 야기를 놀랍도록 차분하게 풀어 나간다.
「그 아이」는 열두 살때 아버지의 외도로 어머니가 외가로 간후 두 살 아래 남동생과 함께 하숙집에 맡겨진다.처음에는 친척집으로 알았다가 나중에 남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큰 상처를 받는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그 여자」의 불행은 꺾이지 않는다.두 명의 남자가 다가온다.동기생인 「잿빛 바바리」와 연극반 2년 선배인 「그 남자」.마음은 섬세한 감수성과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인 「잿빛 바바리」에게 끌리지만 「그 여자」의 운명을결정한 것은 「그 남자」다.
집요한 자기애와 광기에 가까운 열정,부리부리한 눈의 소유자인「그 남자」에게 「그 여자」는 「정상적인 성의 과정을 폭력으로간략화한 관계」를 맺는다.이후 「그 여자」는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그 남자」곁에 남게 된다.어린 시절 어머 니에게 첫 남자와 살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그러나 처음부터 잘못얽힌 두 사람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그 여자」는 헤어지고 난 뒤에도 3년이라는 세월을 고통스런 기억과 싸운다.그리고 나서야 「그 남자」를 비롯한 모든 기억 속의 인물들을 껴안을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의 본류는 하나의 물방울에 불과하던 「그 아이」가 「그 여학생」「그 여자」로 세월의 강을 타고 흘러가 마침내는 스스로 속 깊은 바다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는 성장소설이다.
여기에 곁가지로 페미니즘이 끼어든다.바다에서 바라보는 「그 여자」는 아득한 원경이다.그제서야 남처럼 느껴지는 「그 여자」의 불행의 뿌리가 보인다.「그 여자」의 불행은 성에 대한 무지와 순결관에서 싹텄다.여기에 「일수불퇴(一手不退) 」를 강요하는 공허한 가족주의가 물과 자양분을 공급했다.아버지가 새살림을차렸는데도 자식들 때문에 이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보낸 어머니.그 때문에 오히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 청춘을 보내야 했던 자식들.이 가족관계는 우리 사회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결국 김씨는 여성적 삶의 한 전형인 「그 여자」의 불행이 생기 잃은 가족주의와 순결 이데올로기 속에서 깊어진 풍토병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南再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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