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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歷試)] 우등생 돼 조국 땅 밟은 카레이스키 후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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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해 처음으로 해외에서 치러진 역시(歷試)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카자흐스탄 학생들이 4박5일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24일 서울 경복궁을 방문한 학생들이 품계석에 대한 안내인<左>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김태성 기자]

“와, 근정전 꼭대기에 저게 ‘용마루’인가요? 실제로 보니 용마루부터 처마 끝까지 연결되는 지붕 모양이 정말 신비롭네요.”

24일 오전 10시 경복궁. 설명을 듣는 한 무리의 외국인 학생들이 영하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지하게 눈을 빛냈다. 추위 때문에 발갛게 곱은 손으로 메모를 하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근정전 앞뜰에 놓인 정1품 품계석(관직 서열에 따라 도열하도록 표시한 돌) 옆에서 머리 조아리는 흉내를 내는 이들도 있었다. 지난해 12월 15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처음으로 열린 해외 ‘역시(歷試·한국사능력검정시험)’를 통해 선발된 ‘국사 우등생’들이다.

카자흐스탄이 첫 시행지로 선정된 이유는 지난해가 소련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카레이스키)들이 스탈린 정권에 의해 이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지 70주년을 맞는 해였기 때문. 국사편찬위원회는 총 1010명의 응시생 중 성적 상위 15명에게 4박5일간의 한국 방문 기회를 줬다. 21일 도착한 8명의 고려인과 7명의 카자흐인은 과천에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와 충남 독립기념관, 경복궁·롯데월드·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 등을 둘러보았다.

“단청이 너무 아름다워요. 어떻게 저렇게 세밀하게 장식한 건가요?” 알마티 41 김나지움에 다니는 이 에카체리나(17)는 “시험 준비를 위해 한국사 책을 열심히 공부했지만 이제야 한국의 역사가 몸으로 느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3·1운동을 비롯한 독립운동 이야기를 자주 해주셨다”는 고려인 3세 김 아나스타샤(20)도 감격에 겨워했다. 그는 “내가 한국에 간다는 소식에 할아버지는 기뻐 어쩔 줄 모르셨다. 어제 독립기념관에서 기록영화를 보다 할아버지 생각에 눈물을 흘릴 뻔했다”고 털어놓았다.

카자흐인 오스파노프 누룰란(21)은 “첨단과 역사가 공존하는 서울은 대단한 도시”라며 연방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는 “한국에 오려고 밤샘 공부를 해가며 시험 준비를 했다”며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서 유학한 뒤 알마티(카자흐스탄 제1도시) 주재 한국 대기업에 취업하는 게 꿈”이라고 밝혔다. 이번 시험에서 1등을 차지한 한 율리아(18)는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그렇게 오고 싶어했던 조국에 내가 대신 왔다. 뿌리를 잊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최영묵 대외협력 홍보담당관은 “성공적으로 시행된 이번 시험을 발판으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널리 알리는 데 힘쓰겠다. 국내 역시는 물론이고 해외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해외 ‘역시’를 계속 시행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2회 해외 역시는 8월 미국 뉴욕과 LA에서 치러질 예정이다.

글=이에스더 기자 , 사진=김태성 기자

◇역시=‘역시(歷試)’는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유영렬)가 주관하고 중앙일보가 후원하는 한국사 대중화 프로그램이다. 해외 ‘역시’는 이 취지를 동포들에게까지 확장하려는 시도다. 우리 역사에 대한 소양을 평가하는 역시는 2006년 처음 실시된 이래 3회 시험에 누적 인원 6만여 명이 응시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해 11월 국회 본회의에서 역시 관련법 개정안이 통과돼 국고 보조를 받으며 안정적으로 시행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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