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전광우 신임 포스코 이사회 의장 인터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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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호 28면

안성식 기자

기업의 사외이사에 대해 흔히 따라붙는 말이 있다. ‘거수기’ ‘들러리’ 같은 단어들이다. 주주를 대표해 경영진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한국 기업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하지만 국내 대표 철강기업인 포스코만큼은 예외다.

“대우조선해양은 포스코에 필요하다”

무엇보다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 의장의 역할이 철저히 분리돼 있다. 이사회 의장은 모두 15명의 이사 중 9명을 차지하는 사외이사 가운데 선출된다. CEO가 대통령이라면 이사회 의장은 주주를 대표하는 국회의장 격이다. 이사회 운영도 철저히 사외이사 중심이다. 최고경영자(CEO)는 물론 이사회 후보에 대한 추천, 내부거래에 대한 감시, 감사 등의 권한이 이들에게 맡겨져 있다. 미래 경영 전략과 신규 사업에 대한 결정도 이사회의 권한이다. 경영진이 올린 안건에 대해 가부만 판단하고 자리를 파하는 대다수 기업과는 차이가 크다.

22일 포스코 주주총회에서 새 이사회 의장으로 선임된 전광우(59) 딜로이트코리아 회장은 “포스코는 국민기업을 넘어 세계 최고기업으로 가고 있다”며 “기업 가치를 높이기 위한 투자와 인수합병(M&A)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고 강조했다. 전 회장은 “오너 체제인 국내 대다수 기업과 달리 포스코는 절대주주가 없는 가운데 전문경영인이 실적으로 평가받는 거의 유일한 기업”이라며 “전문 경영이 확산되는 시대적 추세에서 포스코가 한국 기업들의 미래 소유·지배구조의 역할 모델(role model)이 돼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경영과 소유가 분리된 전문 경영 체제로도 세계 수준의 효율성과 투명성을 갖춘 글로벌 기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힘을 보태겠다는 것이다.

국민기업에서 글로벌 리더로

포스코는 흔히 ‘국민기업’으로 불린다. 포항 영일만 갯벌을 메워 제철소를 만들 때 국가 예산이 투입됐고, 이후 국내 산업의 디딤돌 역할을 충실히 해왔기 때문이다. ‘국민주’ 방식으로 민영화되다 보니 소액주주가 많은 기업이기도 했다. 완전히 민영화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이 같은 인식은 아직 국민 사이에서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얼마 전 박태준 명예회장은 한 신문과 인터뷰에서 임원들에 대한 스톡옵션 부여를 강
하게 비판하며 “국민기업의 이미지에 타격을 가한 사건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제철보국의 창업정신을 배반하고 정면도전한 사건” “아직도 스톡옵션 도입이 정당했다고 하는 임원이 있으면 당장 사라져야 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전 의장은 여기에 신중한 입장이다. 그는 “포스코의 발전을 위해 진심 어린 충고를 하신 것일 것”이라면서도 “새로운 패러다임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는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너십과 글로벌 산업환경 변화라는 이중의 변화에 처해 있는 경영진에게 동기부여를 해 주가와 기업가치를 올린다면 주주나 회사는 물론 국가경제에도 바람직하다”는 설명이다. 전 의장은 또 “과거의 경험은 빛도 있지만 그림자도 있게 마련”이라며 “빛은 살리고 그림자는 지워 나가야 발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수직 계열화는 세계적 추세

재계의 관심이 집중된 대형 M&A 대상 중 하나가 대우조선해양이다. 전 의장은 “세계 철강산업의 흐름 중 하나가 수직계열화”라며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대우조선 인수가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철강 값이 급등해 품귀현상마저 빚고 있는 지금으로선 당장 필요해 보이지 않더라도 후일을 위해 안전판을 마련해둬야 한다는 설명이다. 이구택 회장과 윤석만 사장은 최근 “관심 말고 더 좋은 표현은 없느냐”며 인수 의향을 공식화한 바 있다.

철광석과 니켈·몰리브덴 등의 원료를 확보하기 위한 광산업 지분 확보도마찬가지다. 포스코는 호주의 철광석과 니켈 광산 투자에 이어 최근 미국의 몰리브덴 광산 지분을 인수했다. 포스코 경영진이 대우조선 인수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엔 국내 산업 전반에 대한 고려도 있다. 세계 2, 3위를 다투는 대우조선을 국내 경쟁업체인 현대중공업이나 삼성중공업이 인수하면 조선 경기가 꺾일 때 타격이 한쪽에 집중될 수 있다. 그렇다고 산업 연관성이 적은 다른 업체에 넘기기도 어렵다. 전 의장은 “(구축함 등) 방산 부문을 두고 있는 대우조선의 특수성이나 시너지 효과도 감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섣불리 외국 기업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내에서 포스코의 성장전략도 주목된다. 포스코는 그동안 투자대상과 지역을 선정한 뒤 직접투자를 통해 공장을 지어 제품을 생산하는 ‘그린필드형 투자’만 해왔다. 2년 전 중국 상하이 인근에 건설한 스테인리스 일관제철소나 4월 착공 예정인 인도 일관제철소가 대표적이다. 반면 다른 회사의 제철소를 인수하는 데엔 상대적으로 소극적이었다. 한보철강은 위탁경영까지 하고도 끝내 인수하지 않았다. 철강업계에선 이를 생산성과 효율성에 대한 포스코 특유의 자부심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하지만 세계 철강시장이 격변을 겪고 있는 현실에서 그린필드형 성장전략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게 전 의장의 생각이다. 효율성만큼이나 시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제도와 문화가 다른 외국에서 그린필드형 투자는 변수도 많고 시간도 많이 걸리게 마련”이라며 “M&A가 때로는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CEO 승계 플랜이 과제

전 의장은 사외이사가 되기 전인 2004년 초까지만 해도 포스코에 대해 문외한이었다. 지금은 자신을 “포스코와 연애하는 사이”로 비유한다. “이렇게 좋은 인력과 기술을 갖춘 회사는 흔치 않다”는 생각에서다. 이구택 회장에 대한 평가도 후하다. “전문성과 글로벌 감각까지 갖춘 드문 CEO”라고 한다. 그러나 부담감도 그에 비례한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근접하면서도 한국적 특수성을 감안한 포스코형 기업지배구조를 안착시키는 게 그가 의장을 맡은 이사회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전 의장은 “철강업의 특성상 외부인사가 CEO를 맡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이 회장과 같은 능력을 갖춘 내부 인재가 많이 나오도록 하는 게 이사회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단순히 CEO를 선택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CEO 승계를 위한 투명하고 공정한 장치를 마련해 두는 게 이사회의 장기적 역할이라는 얘기다.

전 의장의 좌우명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조화를 이루되 섣불리 동화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포스코 이사회 의장의 역할이 딱 그렇다. 경영진을 지원하면서도 주주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4월로 예정된 철강 가격 인상은 전 의장에게 고민스러운 순간이 될 것이다. 눈앞의 주주이익을 생각하면 철광석 값이 오른 만큼 제품 값을 올려야 하지만, 장기적인 주주가치를 높이기 위해선 오랜 고객인 조선·자동차 등 수요산업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단기적 이익보다 중장기적으로 기업가치를 올리는 것이 주주들에게도 좋지 않겠느냐”며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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