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채용에도 '명문대 제한'이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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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부에서 사기업 취업에 명문대 쿼터제 도입을 계획하는 모양이다. 이른바 스카이(SKY)대학, 곧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의 취업을 제도적으로 제한하고 그 기회를 지방대 출신에게 돌리자는 것이다. 때맞춰 노무현 대통령도 방송통신대 졸업식에 참석해 "학벌사회는 그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다. 실력으로 평가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벌극복기획단'이란 정부조직이 구상해 최근 방송토론에 오른 이 제안은 지난번 해프닝에 그친 '여성전용선거구제'만큼이나 사려도 실현성도 없다. 그러나 이런 발상이 나올 만큼 당국의 의식구조가 변했는가. 평준화와 대중영합으로 치닫는 정부의 제도개혁 공세가 어디까지 갈지 실로 우려되는 상황이다.

대통령의 "학벌 대신 능력으로 평가받는 사회" 발언 배경에는 우리의 기업과 시장구조에 대한 깊은 불신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대 어떤 한국의 성공한 기업이 능력 대신 학벌 연고주의로 사람을 쓴단 말인가. 능력 있는 사람을 뽑는 일에는 기업이 대통령보다 몇 배 더 걱정할 것이다.

한국에서 명문대학은 어떤 사람이 들어가는가. 두뇌와 재정지원의 조건도 필요하지만 초.중.고교 전 과정을 성실히 인내하고 노력하여 학력을 성취한 자가 바늘귀 같은 일류대학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명문대 졸업장은 그의 지식수준과 절제력, 그리고 '성실성'의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이런 학력성취 노력을 평가절하하는 제도는 어떤 의미로도 정의로울 수 없다. 온전한 기업이라면 이런 사람 대신 그 자질이 증명 안 된 학력낙오자를 쓸 수 없다. 이런 기업에 세무조사를 유예해 주겠다면 당국은 국민이 맡긴 국세징수 업무를 사보타주하는 것이 된다.

정부가 지방대생의 취업기회를 돕겠다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번듯한 자리 몇 개에 역선택의 길을 열어주며 정의나 보람을 외치는 것은 곤란하다. 이런 제도는 몇 명의 지방대 취업 예비자만 구제할 뿐이다. 결국 지방대생 중 학력과 서열이 우수한 자가 선발되니 학력서열을 극복하자는 제도가 다시 '학력서열의 고리'를 여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한국의 최고직장이라는 한 공공기관에서는 지방대에 특별채용 쿼터를 제공한 바 있다. 일반공채 대상자의 커트라인이 71점대인데 이들의 합격점수는 최고 68점에서 50점 이하까지였다고 한다. 이 모델은 향후 정부 공기업 방송사 등에서도 본받을 것이라고 한다. 이런 조직에서야 예산 축내기 이상의 부작용이 없겠지만 한국 사회를 먹여 살릴 사기업에 이 제도를 강요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필자는 신입생 새내기들에게 말해왔다. "여러분은 간발의 차이로 스카이대를 못 가고 이 학교에 들어왔다. 향후 4년이 그 차이를 극복할 마지막 기회다. 그러니 스카이가 놀 때 너희는 노력해 사회에는 승리자가 돼 나가라." 그런데 이제는 "이 대학 입학으로 네 출신은 결정됐다. 스카이에 빼앗긴 네 기회를 찾는 데나 전념해라. 지방대 출신에게는 네 기회를 나눠줘라"고 해야 하는가.

실로 시장사회의 기회는 '간발의 차'가 결정한다. 칼날 같은 경쟁사회에서 기업.학문.문화.예술.스포츠 어디에서나 머리카락 같은 차별요인 하나가 승부를 결정한다. 그 결과를 개인은 보수.권리.명예로 수확하고, 국가는 부강.번영으로 보상받는다. 이것을 보수기득권층의 신자유주의라고 매도한다면 동북아중심, 일류기업, 10대 첨단산업, 100대 명문대학 따위의 구호도 같이 버려야 한다.

명문대 채용쿼터 같은 제안은 정부가 자격미달자에게 베푸는 시혜다. 극소수 지방대 출신에게는 대박이 터질지 몰라도 일자리를 창출할 기업투자에는 또 다른 불확실성만 제공한다. 오늘날 정부가 학벌연고적 시장을 걱정할 상황인지, 시장이 코드연고적 정치를 걱정할 상황인지 실로 황당할 따름이다.

김영봉 중앙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