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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읽기] 명품병에 걸린 애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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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 5년째인 M씨(29). 지난 봄, 우연히 소개팅에서 만난 여성과 사랑에 빠져 올 가을엔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다. 세살 연하인 그녀는 안정된 직장을 다니는 데다 재치 있고 애교도 많다. 그런데 지난주, 만난 지 1년 되는 날을 기념해 그녀에게 준 선물이 문제가 돼 M씨는 요즘 난처한 상황에 빠졌다.

그날 멋진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그녀는 넥타이를 건넸고, 그는 스카프를 줬는데 그녀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냥 지나치려다 혹시나 해 "색상이 마음에 안 드느냐"고 물어봤는데 그녀는 의외로 "오늘 같은 날 겨우 스카프를 선물하느냐"며 핀잔을 주는 게 아닌가.

연이어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이 이런 날 애인에게서 받은 고급 선물을 나열한 뒤 급기야 "나를 사랑한다면 그런 종류 중에서 하나를 골라 다시 선물하라"고 주문했다. 순간 그는 무안해 하며 "내가 잘 몰라 그랬다"며 다음에 그녀가 원하는 물건을 사주겠다는 다짐을 했다.

일단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날 이후 M씨의 머릿속은 혼란스럽다. 물론 그도 그녀가 원하는 명품 하나쯤은 사줄 수 있다. 하지만 애인 선물로 값비싼 명품을 산다는 생각은 솔직히 해본 적이 없다.

'내가 치사한 남자인가'자문도 해 보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그녀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걸까, 아니면 내 생각이 답답한 걸까.

먼저 M씨는 결혼 전 남녀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점검한 뒤 그녀와 서로의 견해를 나눠볼 필요가 있다. 전통사회에서 남녀관계는 경제활동의 주체인 남성(아버지.남편.애인 등)에게 여성이 상당부분 종속되는 수직관계다. 맛있는 음식도, 예쁜 옷도, 좋은 이부자리도 남성이 호의를 베풀어야 여성은 수혜자가 될 수 있었다. 자연 여성은 갖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가능한한 남성에게 부탁.아첨.투정 등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반면 현대사회의 남녀관계는 스스로 책임지면서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수평관계를 추구한다. 이는 가능한 모든 면에서 '권리'와 '의무'를 남녀가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M씨와 그녀가 양성(兩性) 평등에 기초한 남녀관계를 원한다면, 자신은 넥타이를 선물하면서 M씨에게는 고가의 선물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그녀의 행동에 M씨가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점을 솔직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런 행동은 그녀가 원치 않을 종속적 남녀관계에서 비롯된 발상이라는 점도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명품이라고 해서 유명 인사의 전유물은 아니며 누구나 한번쯤은 장만할 수도 있다. 또 '이번엔 특별한 날이니까' 혹은 '그러는 친구도 있다니까'라며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근본적인 생각이 그럴진대, 앞으로 챙겨야 할 기념일마다 M씨가 마련한 선물 가격을 사랑의 크기로 측정하려 한다면 어쩔 것인가.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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