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제2부 불타는 땅 꽃잎은 떠 물위에 흐르고(19) 술병을 껴안듯 앞에 하고 앉아서 야마구치는 밤바람에 날리는 화순의 머리칼을 바라보았다.계집이 그렇게 독해 보이지도 않는데 조선놈 도망치는 걸 모의했다 그말인가.하기는 여자 마음속을 들어가본다고해서 알 것도 아니지.
『넌 안 마실래? 내가 조금만 더 마셔도 되겠냐?』 『날아온돌이 박힌 돌을 뽑는다더니,이게 그꼴이네.술은 커녕 누가 거기앉아 있냐고 소리소리 지르던 게 언제였더냐 싶네.』 술이란 게그런 거 아니냐.여자하고 똑같다구.생각이 없다가도 보면 또 그게 안마시고는 못배기는 거 아니겠어.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야마구치가 두 손으로 한 되들이 술병을 들어올렸다.그는 꿀꺽거리며몇 모금을 마시고나서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안그러냐? 여자도 마찬가지다.옆에 없으면 그냥 잘건데도 그게 살이 닿았다 하면 생각이 달라지거든.으흐흐,안그러냐?』 말없이 굳은 얼굴을 하고 화순은 야마구치를 바라보았다.이 놈이나바다에 처넣을까.어둠 때문에 야마구치는 화순의 불이 흐르는 듯한 눈을 보지 못했다.
화순이 몸을 일으켰다.
『잘 계시오.』 그녀의 조선말에 무슨 소린지도 모르면서 야마구치도 따라서 일어섰다.화순이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자식 잘 거두고….
마누라랑 백년해로하시오.』 『하,하나코.너 지금 무,무슨 소리냐?』 대답도 없이 화순이 돌아섰다.
『난 갑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순은 방파제를 걸어나갔다.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옷자락을 찢어갈 듯 휘감았다.저놈도 다 불쌍한 놈이지.일본사람도 다 불쌍하지.
무슨 죄가 있어서 전쟁을 하며 누군들 죽고 싶어서 죽을까.화순은 얼굴을 내리덮는 머 리칼을 손으로 밀어올렸다.아니지.아닐지도 모른다.초록은 동색이 아니던가.다함께 손발이 맞아서 일본전체가 들썩거리며 저지르는 짓이 아닌가.네놈들도 뿌린 씨는 거둬야 할 게다.그럼 똥은 싼 놈이 치우기다.
멀어져가는 화순을 보며 야마구치가 물었다.
『하나코,너 괜찮겠냐?』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야마구치는 술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저 계집이 듣던 거 하고는 다르잖아.아주 쓸만한데 그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