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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靑幇 두목 황진룽의 배짱과 굴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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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호 38면

대세계 앞을 청소하고 있는 황진룽. [김명호 제공]

1949년 5월 26일 국민당군 25만 명이 상하이에서 투항하거나 철수했다. 이틀 뒤 공산당은 상하이시 인민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장제스의 후견인으로 공산당원과 노동자 도살에 앞장섰던 청방(靑幇) 3대형(大亨) 중 장샤오린은 이미 암살당했고 두웨성(杜月笙)은 홍콩으로 피신한 후였다. 그러나 가장 연장자였던 황진룽(黃金榮)은 상하이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천명에 따를 뿐이다. 어차피 늙은 목숨이다”라며 태연자약했다.

수십 년간 세 사람은 무슨 일이건 만사형통(萬事亨通)이었다. 그래서 다들 대형(大亨)이라고 불렀다. 공동묘지의 잡초를 무성하게 만든, 이름만 들어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산당 치하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황진룽이 상하이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변화가 무쌍한 때일수록 변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확고한 철학과 생활습관 때문이었다. 그는 하루도 거를 수 없는 게 세 가지 있었다. 아편과 마작·목욕이었다.

황은 공산당 천하가 된 후에도 여전히 집안에 아편을 쌓아 놓고 즐겼다. 그의 집은 지하 황제답지 않게 단출했다. 아들과 손자·며느리·요리사·청소부 등 20여 명이 복작거리며 한집에 살았다. 정원도 없고 담도 없었지만 주변이 모두 부하들의 집이었다. 한 구역이 그의 집이나 다름없었다.

생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친구와 부하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고 마작 상대도 여전히 넘쳤다. 하루에 여섯 번 밥 먹는 것이 가장 시시한 일이었다. 홍콩으로 피신은 했지만 부인에게 노래 한 곡 청해 듣는 게 고작이었던 두웨성에 비하면 나은 점이 많았다.

황진룽의 목욕 습관은 특이했다. 대중탕에 수십 명을 거느리고 떼로 몰려가 요란하게 하는 목욕이었다. 집에서는 하는 법이 없었다. 그의 고향에 ‘아침에는 피부가 물을 받아들여야 하고, 밤에는 물이 피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아무리 되씹어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황은 자기 나름대로 해석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차를 여러 잔 마시고 온종일 물에는 손도 대지 않다가 밤만 되면 목욕탕으로 향했다. 두웨성이 홍콩으로 가자고 했을 때 “나 같은 팔십 노인들이 매일 밤 갈 수 있는 대중탕이 있느냐”고 물었다. 다른 것은 궁금해하지 않았다.

황진룽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큰아들은 죽고 큰며느리가 집안일을 관장했다. 능수능란한 여자였다. 거짓말을 잘했고 꾀가 많았다. 둘러대기를 잘해 황도 깜빡 속을 때가 많았다. 나름대로 시국을 보는 눈도 있었다. 집에 있는 돈을 모조리 챙겨 홍콩으로 달아나 잠적했다. 얼마 후 ‘남편이 없어졌다’며 허둥대는 사람이 있었다. 집안 청소부의 부인이었다.

며느리 때문에 망신은 당했지만 경제적 여유는 여전했다. 상하이 인민정부는 황진룽의 사업 중 도박장과 사창가 외에는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동양 최대의 오락장 대세계(大世界)의 영업을 중단시키지 않았고 황금대희원(黃金大戱院)도 중공 화동국 소속 극단이 임대해 매달 일정액을 황에게 지불했다. 시민들의 불만이 컸지만 인민정부는 모른 체했다.

51년 반혁명 소탕운동이 시작됐다. 집 앞에 군중이 몰려와 ‘비판대회에 나오라’고 외쳐댔다. 황의 악행들을 나열한 고발장이 사법기관에 산처럼 쌓여 갔다.

다급해진 황진룽은 반성문과 청방 간부들의 명단을 공안국에 제출했고 사회봉사를 하겠다며 지난날 그의 영화가 서린 대세계의 문 앞을 빗자루 들고 쓸기 시작했다. 인민정부는 황의 반성문과 청소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인민정부의 골칫거리였던 청방은 몰락했다. 시민들은 그제서야 인민정부가 황진룽을 방치해 두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황진룽은 3년을 그러다가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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