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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한지 작품에 혼을 담아 뉴욕·도쿄를 감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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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작가 전광영(64·사진)의 경기도 판교 작업실에는 평면 작품 두 점이 걸려 있다. 한 점은 1995년 이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한지 고서로 싼 스티로폼 조각들로 만든 ‘집합(Aggregation)’ 연작, 다른 한 점은 73년 미국 유학 시절 그린 색면 추상화다. 50년대 미국의 화가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등을 연상시키는 파란 선에 붉은 네모의 유화다. 그에게 올해는 특별하다. 9월에 미국 뉴욕의 로버트 밀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77년 개관해 루이즈 부르주아, 장 미셸 바스키아, 구사마 야요이 등 이름난 작가들이 거쳐간 전통의 메이저 화랑이다. 연말엔 미국 코네티컷의 얼드리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다. 제목은 ‘The Soul-Journey to America’. ‘집합’ 연작의 재료인 한지 고서를 만지작거렸을 사연 많은 영혼들이 미국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의미다. 2009년 봄에는 일본 도쿄 모리미술관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거부(拒否)가 나를 키웠다”

환갑 넘은 나이지만 그가 국내외 화단에서 이렇게 주목받는 작가가 된 것은 불과 13년 전이다. 68년 홍익대 미대 졸업 후 미국 필라델피아 대학원을 나온 엘리트지만 파벌의 위계질서에 녹아들지 못한 그를 국내 화단에서는 철저히 거부했다. 후배들이 유수의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열 때 전씨는 인사동 화랑에서 없는 돈을 털어 대관전을 가졌다. 89년 “그림 그만 그리고 리어카 끌고나가 행상이라도 해야겠다”며 마지막으로 아내와 6개월간 전국을 돌았다. “온양 민속박물관에만 서른 번 넘게 앉아 있었어요. 아낙네들 방아 찧는 소리, 노비들 신세 한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내가 한국 사람인데 남의 이야기만 했으니 누가 나한테 주목했을까’ 싶었어요.” 어린 시절 한약방을 하던 큰아버지댁, 약재를 종이에 싼 뒤 끈으로 주렁주렁 매달아 놓은 한약 봉지를 생명줄인 양 정성스럽게 주고받던 모습이 떠올랐다.

#수십 년 역사, 수백 명 손길의 집합

집합(Aggregation) 001-MY057, 2001, 한지 등 혼합매체.

“서양은 박스 문화, 우리는 보자기 문화예요. 보자기는 규격이 없어요. 친정어머니가 시집간 딸에게 하나라도 더 싸주려고 애쓰는 마음, 정이 담깁니다.”

스티로폼을 세모꼴로 잘게 잘라 고서의 한 페이지로 싸고 종이끈으로 묶은 뒤 캔버스에 차곡차곡 붙였다. ‘집합’ 시리즈는 이렇게 나왔다. 95년 박영덕 화랑의 눈에 띄어 나이 쉰에 첫 초대전을 열었고 그해 LA 아트페어에 출품한 집합 시리즈가 모조리 팔렸다. 한지 작업을 먼저 알아본 것은 외국, ‘왕따 작가’의 역수입이었다. 왜 한지인가. “식물에서 추출해 손으로 떠낸 종이, 이 한지를 선조들은 벽에도 바르고 문풍지로도 썼어요. 한지로 만든 책엔 우리의 정신을 담았고요.” 한지 고서에는 또한 여러 사람, 여러 세월, 여러 이야기가 있다. “그들 시대에 맞는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그 이야기, 그 혼을 싸서 제 혼을 담았어요. 그렇게 하니 제 이야기가 됐죠. 바꿔 말하면 크리에이티브입니다.”

#이제 막 반환점 돈 마라톤 선수

‘집합’은 진화 중이다. 모노톤에 평면작업이던 것이 2000년 이후 색과 형태를 갖추게 됐다. 지름 2m 가까운 구형으로 매달려 있기도, 운석의 분화구처럼 검은 그림자가 지기도 했다. 9월 뉴욕에 가져갈 ‘집합’에는 선이 들어간다.

늦된 성공만큼 작업도 느리다. 스스로 “미련하리만큼 찢고 싸매고 붙인다”고 말한다. 100호 크기라면 한지에 싼 스티로폼 조각이 7000개가량 들어간다. 그런 전씨는 자신의 작가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기를 즐긴다. “100m 단거리 선수는 출발 신호 뒤 3초 내에 순위가 결정돼 버립니다. 마라톤은 달라요. 마지막 1.5㎞, 2㎞ 남기고 그라운드를 탁 차고 도는 선수처럼, 저는 이제 막 반환점을 돌았습니다.”

글= 권근영 기자, 사진= 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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