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다만 이런 순간들이 떠오른다. 열여덟 살, 야간자율학습에 지쳐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에 낯익은 남대문이 보였다. 남대문은 아무 말도 없이 푸근하게 웃는 것 같았다. 잠결에 엄마가 따뜻한 손으로 이마를 짚어 줬을 때처럼 나는 안심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스물 몇 살 무렵에는 남산타워에 올라갔다가 명동을 거쳐 남대문까지 걸어갔던 적도 있다. 초여름 저녁, 선선하고 맑은 바람이 불었고 막 친해지려고 하던 누군가와 함께였다. 우리는 앞으로 가보고 싶은 세계 곳곳의 도시들에 대하여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떠나고만 싶던 지루한 고향 서울이나 영원불멸하게 그 자리에 있을 것처럼 견고하던 남대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연락이 끊어진 그 친구도 아직 이 도시 어딘가에 살고 있을까? TV 생중계를 통해 활활 불타는 남대문을 바라보면서 나만큼 망연자실하고 황망했을까?
숭례문 화재 사건이 유난히 충격적이었다면, 그것은 안전하고 평화로워 보이던 평범한 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파괴되어 버릴 수 있다는 공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어떤 상상력으로도 예측할 수 없었던 참사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비참하게 불타버린 채 초라한 모습을 드러낸 숭례문 앞에서 설명하기 힘든 무력함과 가슴의 통증을 느낀다. 방화범이 검거되고, 토지보상 문제의 개인적 화풀이 때문에 불을 질렀다는 범행 동기가 발표되었다. 방화의 원인을 둘러싼 직간접 책임 논란, 문화재 관리 소홀과 향후 대책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지만 한번 잃어버린 것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어서 더욱 막막하다.
전소된 숭례문 앞에 시민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은 조화가 늘어나고 있다. 12일엔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라는 리본이 달린 화환이 배달됐다. [사진=박종근 기자]
이 어이없는 사고가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만을 속절없이 바란다.
글=정이현 소설가,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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