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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분단의 원일을 찾아4.우리도 책임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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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반도 분단의 책임을 외세(外勢)에만 돌릴 수는 없다.45년8월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영구분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사실 해방정국의 소용돌이속에서도 우리 정치지도자들이 타협과 협상의 지혜를 발휘 했더라면 분단을 극복할수 있는 기회가 몇차례 있었다.첫번째 기회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서였다.
건준은 해방과 동시에 여운형(呂運亨)이 중심이 돼 만든 조직체였다.말 그대로 건국(建國)을 위한 준비기구였다.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유지와 건국사업을 위한 권한까지 넘겨받아 막강한 힘을가질수 있었다.지부도 45년8월말까지 전국적으로 1백45개가 설치돼 조직력이 전국곳곳에까지 미쳤다.
또 조직의 성격도 여운형이 이끄는 중도좌파계열뿐 아니라,안재홍(安在鴻)을 중심한 중도우파계열,정백(鄭栢)을 비롯한 장안파공산계열,그리고 이강국(李康國)의 재건파 공산계열이 결집한 연합전선적 성격을 띠었다.이념적으로도 정치적 자유 와 경제적 평등에 기초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했다.대외적으로는 美蘇 모두에 대한 중립적 우호전략을 추구했다.
박사명(朴思明.강원대 정치학과)교수는『건준은 일본통치를 대체하는 새로운 민족적 권력으로서의 잠재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더욱이 美蘇가 진주하기 이전이었으므로 좌.우익 정치세력이 건준을 중심으로 연대했다면 연합국의 진주 이전에 임시연립정부 수립도 가능했을 것이다.이후 임시연립정부가 연합국과 완전독립을 위한 협상을 벌였더라면 상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 다.
그러나 정국 주도권을 빼앗긴 우익세력은 건준에 배타적인 태도를 취했다.또 공산주의 일파인 박헌영(朴憲永)세력이 건준을 장악하려고 기도함으로써 건준은 해체되고 말았다.대신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이 수립됐지만,이때는 이미 좌익단체의 성 격을 분명히하고 있었다.
비록 첫번째 기회는 사라졌지만 좌.우익이 연합할 수 있는 기회는 또다시 찾아왔다.신탁통치 방침이 결정된 모스크바 삼상회의결정서가 발표된 직후였다.민족의 장래가 기로에 놓인 시기였다.
46년 1월초 인공은 김구(金九)가 이끄는 임시 정부(임정)에대해 두 기구를 동시에 해체하고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자고 제의했다.그러나 임정측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임정으로서는 신탁통치반대운동으로 장악한 정국 주도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을 뿐아니라 인공과 동격으로 취급하려는데 대해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美蘇공동위원회의 개최를 앞두고 무작정 분열할 수만은없었다.좌.우익 주요 5개 정당인 한국민주당(宋鎭禹),국민당(안재홍),인민당(여운형),공산당(박헌영),신한민족당(金麗植)은다시 머리를 맞댔다.임정도 후원세력으로 가세했다 .
합의점이 도출됐다.「모스크바 결정서의 정신과 의도 지지,임시정부수립후 탁치문제 해결」이 바로 그것이었다.그러나 반탁(反託)의 입장을 고수하는 우익측의 태도와 각 정당간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제1차 美蘇공위가실패하자 분단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려는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이승만(李承晩)의 단독정부론마저 제기됐다.이같은 분단 고착화의 위기감에서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 등 온건 좌.우파가주축이 된 좌우합작운동이 전개됐던 것이다.
이 운동은 미군정(美軍政)의 지원까지 받았다.그러나 탁치문제와 토지문제처리에 대한 좌.우익의 의견 차이와 좌익측의 폭력노선 추구로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美 軍政서도 지원 해방정국의 좌.우익 정치지도자들은 이념적 대립과 정치적 견해차를 끝내 좁히지 못함으로써 임시연립정부를 수립하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당시 정치무대에 내로라하는 정객들이 모두 등장했지만 우리민족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분단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최선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행동하는 지도자들이 부족했다는 것은 커다란 불행이었다.
무엇보다 좌.우익 양측간 분열을 초래한 직접적 계기는 신탁통치문제를 놓고 서로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는데 있다.좌.우익은 탁치문제에 대해 타협의 여지를 배제했다.
때문에 이 문제는 양측간의 협상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분단의 고착화를 가속화시킨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호재(李昊宰.고려대)교수는『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는 조선임시정부의 수립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었다.신탁통치안도 조선임시정부와 협의한 후 제출토록 되어 있었다.일단 임시중앙정부를수립하고나서 연합국과 탁치문제에 대해 협상했다면 통일민족국가로갈 수 있는 길이 열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信託案 협상여지 즉 당시는 美蘇에 의해 분단은 됐지만 고착화된 것은 아니었고 신탁통치안도 협상의 여지가 있었다.따라서 모스크바 결정서대로 임시중앙정부를 수립한 후 신탁통치에 대한 한국인의 의사를 통일시켜 연합국과 협상을 벌였더라면 분단이라는 최악 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좌.우익은 끝내 분열하고 말았다.그 대가는 분단의 고착화로 나타났다.
분단은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통일을 지향하는 우리가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김상도,정재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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