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건설 어떤회사인가-65년 설립돼 군납공사로 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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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난 65년 설립된 유원건설은 군납(軍納)공사,그것도 주한미군공사 수주를 밑거름으로 성장했다.한때는 도급실적의 80%가 군납공사였다.70년대초 오일달러를 밑천으로 국가건설사업에 박차를 가하던 사우디정부가 미군공병단(COE)에 이를 맡기자 유원은 한국에서의 연고를 바탕으로 약진을 거듭,83년에는 해외건설도급실적이 10억달러에 이르렀다.
군사정권때는 군납공사를 통해 두텁게 형성된 군맥(軍脈)이 큰힘이 됐다.서울시가 도심 교통난 완화를 위해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북부간선도로 유진상가~평창동구간의 경우 당초 계획은유원건설이 당시 종로구부암동에 짓고 있던 고급 빌라부지 바로 옆으로 고가도로가 통과하게 돼 있었다.
그러나 얼마후 문제의 구간은 TBM공법의 터널식으로 설계가 변경됐다.뿐만 아니라 유원은 이 구간에 바로 이어진 평창동~정릉구간 터널공사까지 수주했다.이 구간도 역시 TBM공법이 적용됐다.TBM구간은 TBM장비를 보유한 업체만 응찰 할 수 있었고 유원은 당시 TBM장비를 가장 많이 보유한 업체였다.
공교롭게도 문민정부들어 유원이 계속 부도설에 시달리다 마침내주거래은행으로부터 「제3자 양도」라는 최후통첩을 받게 된 것을두고 이같은 성장배경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건설업계의 관측도 있다.93년에 창업자인 최효석(崔孝錫)회장이 타 계하고 올해 32세인 장남 최영준(崔泳俊)사장이 경영권을 승계했다.차남인 최영진(崔泳軫.30)씨는 계열사인 대성목재 전무를 맡았다.시장규모가 한정돼 있는 TBM공법에 매달려 한대에 1백억원이 넘는 TBM장비를 마구 들여와 1천억원의 자금이 묶이는등 판단의 실패도 부실의 주요인이었다.89년 신도시건설이 시작될 무렵 유력건설업체로는 거의 유일하게 이를 외면하고 당시 대부분 업체들이발을 빼기 시작하던 오피스텔 건설사업에 뒤늦게 뛰어든 것도 뼈아픈 실책으로 지적되 고 있다.청구.우방.건영등 후발업체들이 신도시아파트에서의 성공을 계기로 도약한 것과 대비된다.그러나 지금도 관급토목공사 수주액 5위를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이 분야에서 쌓은 유원의 관록은 업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91년3월팔당대교 ,89년4월 올림픽대교등 유원이 건설하던 대형교량이 모두 건설도중 붕괴되기는 했지만 토목분야는 유원의 주특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동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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