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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길 떠나는 시 ⑤ 『하룻밤 돌배나무 아래서 잤다』 김남극 시집(문학동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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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는 것의 슬픔과 구르지 못하는 것의 슬픔

지게를 진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담배를 물고 뽀로롱 마가리로 사라진다
오토바이를 타고 피울 수 있는 담배는 장미밖에 없다

챙이 넓은 모자에 수건을 동치고 세레스 적재함에 올라앉은 아주머니가 뭘 오물거리며 실려간다
세레스 적재함에서 먹을 수 있는 건 찰강냉이밖에 없다

JD트랙터 해가림 천막 속에서 버클리대 모자를 쓴 친구가 밭가에 트랙터를 세우고 커피를 마신다
밭가에서 마실 수 있는 건 정다방에서 배달된 커피밖에 없다

친구 몇이 솔모종거리에 모여 장미 담배를 물고 찰강냉이를 물어뜯으며 정다방 정양을 기다린다

-<산협(山峽)> 전문

시집에 첫 시로 수록된 위 시의 풍경은 익살스럽다. 오토바이와 담배, 세레스 적재함과 찰강냉이, 밭과 커피로 이어지던 반복이 마지막에 이르러서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 그렇다. 조금 과장해서 말해보면, 밀레의 그 어떤 농촌 그림들을 비틀고 야유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찬찬히 읽어보면 묘하게도 시인은 익살을 과장하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의 익살이 근거가 되는 기다림의 모양새는 역동적이라기보다는 정태적이다. 동영상이 아니라 사진, 컬러가 아닌 흑백의 뉘앙스이다. 그렇게 익살은 자제되거나 유예되고 있는 셈이다. 무엇이 시인을 주춤거리게 만든 것일까?
이쯤에서 당연히 이야기되어야 할 사실은 위 풍경이 엄연한 농촌풍경이라는 점이다. 다 잘 알다시피 우리네 농촌의 현실은 전혀 익살스럽지 않다. 농사는 이미 시대적․사회적 삶의 중심에서 밀려났고 젊은이들은 다들 어디론가 떠났다. 심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농촌은 낙오와 열패의 공간으로 전락한 셈이다. 그래서 사뭇 익살스러운 풍경 뒤에도 씁쓸함 혹은 처절함과 같은 비극의 정조가 배어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위 시는 익살과 슬픔을 동시에 맛봐야만 제대로 읽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시인은 익살과 슬픔, 두 길을 두고 어디로 몸과 마음을 움직여 갈까?

바퀴 있는 것들은 슬프다
어디론가 가야 하고
공기압보다 큰 짐을 실어야 하고
집 나서면 헝클어진 길을 찾아야 하니

굴뚝 모퉁이에 낡은 리어카
어둠에 바람이 빠졌다가
햇살로 바람을 바퀴에 뿍뿍 자아넣고
엉크린 바퀴살에 녹이 저승꽃처럼 피어도
이젠 더 싣고 갈 가계도 없는데
쫓겨나고 싶지 않은
쫓겨나도 갈 곳 없는 천덕꾸러기처럼
오래 엎드려서
가끔 들여다보는 식솔들 뜨뜻한 시선으로 또
뿍뿍 바퀴에 바람을 잣고 있다

바퀴가 있으나 어디론가 가지 못하는 것들은
더 슬프다
-<바퀴 있는 것은 슬프다> 전문

도시의 어느 시인은 말했다.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고. 농촌의 시인도 굴뚝 모퉁이에 있는 리어카의 바퀴가 굴러가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농촌의 시인은 도시의 시인처럼 삶에 대해 발랄하지 않다. 오히려 “바퀴 있는 것들은 슬프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단순 비교하자면 대단한 페시미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페시미즘에도 사연은 있을 터. 위 시의 핵심을 짧게 말해보면, “바퀴가 있는 것들은 길을 나서야하므로 괴로워 슬프다. 하지만 바퀴가 있음에도 어디론가 가지 못하는 것들은 더 슬프다.” 정도가 되리라. 다른 각도로 말해보면, 바퀴가 있는 것들은 두 겹의 슬픔을 갖는다. 첫 번째 슬픈 까닭은 어디론가 가야만 하고, 자신보다 더 무거운 짐을 실어야 하고, 헝클어진 길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슬픔은 바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론가 가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슬픔이다. 바퀴가 있다는 것은 구를 수 있다는 것이고, 구를 수 있다는 것은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떠날 수 있음에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은, 그 바퀴가 일종의 ‘네모난 동그라미’처럼, 모순에 찬 그 어떤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동그라미를 네모로 만드는 그 어떤 안팎의 모순이 시인과 리어카의 이동과 회전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그것이 시인이 놓여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이 두 번째 슬픔이 좀 더 본질적인 슬픔에 가깝다. 가령, 위 시에 빗대어 이렇게 노래해볼 수도 있으리라.

기도 하는 자들은 슬프다
무언가를 원해야 하고
자신보다 큰 고통을 담아야 하고
소원하면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야 하니

기도를 했으나 그 무엇도 희망하지 못하는 자들은
더 슬프다

모순에 발목 잡힌 시인은 정말이지 기도를 한다. 그러나 그 기도는 불온하다. 죽음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 아버지의 죽음도 경험한다.

잣나무 가지에
매미가 벗어놓은 몸
참 고단했겠다
몸속 진을 다 빼서 입었을 몸
참 잘도 빠져나갔다

나도

이 몸을 벗어놓고
잣나무 가운데 가지쯤에서

몸 벗어놓고
잣나무 가지 끝에서

뛰어내렸으면
-<입추> 전문

시인은 이처럼 죽음과 절망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이내 호두알처럼 단단히 마음을 벼린다.

아이가 가래 두 개를 주워왔다
대야에 담가 불려 껍질을 벗기고
솔로 문질러 씻었다
들기름 찌꺼기를 먹여 윤을 냈다
장난감으로 쓰려나 했더니
지압용으로 쓰려나 했더니
책상에 모셔놓고 늘 경건하게 바라본다
그 까닭을 물으니

신기해서란다. 어떻게 나무에서 나무보다 단단한 열매가 달릴까

마당가 가래나무 잎 진 아래에 앉아
몸과 마음을 더듬거렸다

마음은 생각보다 단단하고
몸은 마음보다 더 단단하다
-<가래 두 개> 전문


나무보다 단단한 나무 열매! 이것이야말로 시인이 찾은 바퀴이다. 사실 시인은 나무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의탁한다. 시집 곳곳에 등장하는 나무들이-시 제목으로 쓰인 것만 꼽아도 만만치 않다. <도랑가 잣나무 생각><층층나무 아래서><은행나무꽃><돌배나무 아래에서><살구나무의 비밀><양귀비꽃 피는 집><산목련꽃 핀 집><홍송(紅松)을 찾아서><선인장꽃 핀 집><마른 물푸레나무 한 묶음><싸리꽃><속이 궁근 나무 같은 몸이><국화가 꽃이 피는 이유><순교하는 자작나무> 등이다-그 뚜렷한 증거이리라. 나무, 이 향일성(向日性)의 족속들은 발이 없는 대신 팔을 줄곧 위로만 쳐든다. 태양과 한 뼘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 허공을 사다리 삼아 오른다. 그게 발 없는 나무의 동학(動學)이자 운동론이다. 시인은 바퀴의 운명에 한탄하는 대신, 나무의 치솟음을 자신의 바퀴로 삼는다. 땅과 맞닿으며 수평으로 이동하는 대신 땅에 뿌리박는 대신 위로 치솟는다. 바퀴가 하늘로 간다. 아니 바퀴가 날개가 됐다!
하지만 위로 오를 때 위험은 없을까? 위로 오르면 아래를 굽어보게 되고, 아래를 굽어보다 보면 형이상학의 놀음이 시작되기 십상이다. 우리의 시인은, 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들을 통해 짐작해보면, 아직 그렇게까지 위험하도록 높게 오르지는 않았다. 가래나무는 자신이 오른 높이에서 단단한 열매를 떨어뜨리며 시인은 “마당가 가래나무 잎 진 아래에 앉아”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층층나무 아래서><돌배나무 아래에서>) ‘나무 아래’를 자신의 주 공간으로 삼는다. 따라서 나무-시인의 높이는 “정다방 정양”을 기다리는 친구들을 굽어볼 정도까지랄까. 그 높이에서 익살과 슬픔의 교묘한 이종교배가 벌어진다. 떠나지 못한 것들의 조촐한 잔치와 떠날 수 없는 것들의 간절함이 뒤섞인다. 커피야말로 그때 적당하다. 커피는 달면서도 쓰다. 그게 또한 시다. 희망과 절망, 웃음과 눈물, 이곳과 저곳, 지금과 그때, 수평과 수직, 운동과 멈춤이 아예 한 몸일 수 있는 게 바로 시다.
그래서일까? 시를 보면 굴리고 싶어지는 이유가.

글_ 김용필 북리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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