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남북관계 ‘갑·을’ 바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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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05년 10월 북한은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회의에서 느닷없이 6000만 켤레 분량의 신발 원자재 등을 요구했다. 당시 개성 회담장에 나가 있던 실무진으로부터 보고를 들은 통일부의 한 간부는 “이건 나라도 아니다”라며 북한을 강력 비판했다. 결국 남북은 진통 끝에 남한 원자재와 북한의 지하자원을 맞바꾸는 형식에 합의했다. 그러나 새 정부에선 이 같은 합의가 재연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새 정부가 북한에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적극 요구하며 경협과 인도주의적 지원도 이에 연계시킬 수 있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새 정부가 추진할 대북 정책의 골격이다. 진보정권 10년간 주면서도 조심스러웠던 남한과 받으면서도 목소리를 높였던 북한 사이의 관계를 바로잡는다는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 인사는 4일 “그동안 남한이 경제적·이념적 우위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북한에 대해 ‘갑’ 행세를 못하고 ‘을’로서 끌려 다니는 관계였다면 새 정부의 대북정책은 남북 관계에서 을이 아닌 갑으로서 주도권을 갖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수위의 다른 인사도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강조하는 남북 관계의 정상화는 그간 주기만 하던 비정상적 관계를 바꿔 남한이 주도적으로 북한의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유도하겠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따라서 새 정부의 대북 정책은 전쟁불사 식의 수구론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햇볕 지원도 아닌, ‘조건을 단 대북 개입 정책(conditional engagement policy)’”이라고 말했다.

인수위의 외교통일안보 분과 위원들도 “이명박 당선인의 머릿속엔 퍼주면서도 북한의 눈치를 봤던 과거 남북 관계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깊게 깔려 있다”고 입을 모은다. 따라서 외교통일안보 분과에서는 핵 폐기, 개혁·개방 유도, 인권 개선 등 북한에 요구할 분야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 당선인의 대북 공약인 ‘비핵·개방·3000’ 구상에 맞춰 비핵화와 남북 경협을 연계하고, 대통령 직속기구로 개편된 국가인권위원회나 외교통일부 내 북한인권 부서에서 북한 인권을 점검하며, 필요할 경우 북한인권 백서도 만드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노무현 정부에서 드러내지 않고 진행해 왔던 국군포로·납북자 송환 요구도 전담 부서가 생기며 적극 추진될 전망이다.  

관건은 북한이 이런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일 것인가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현재 식량 부족 등 경제난을 겪고 있는 북한은 당분간은 판을 깨기 어렵다”며 “북·미 관계가 급진전되고 중국의 지원이 가시화될 경우 북한이 어떻게 나올지가 관심”이라고 말했다. 

채병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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