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혼했다가 또 이혼하면…” 신중한 법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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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 16면

2003년 방영된 드라마 ‘노란 손수건’의 한 장면. 자녀는 아버지 성을 따라야 한다는 부성(父姓)주의의 문제점을 다룬 이 드라마는 호주제 폐지 여론을 확산시켰다. KBS 제공

자녀의 성(姓)과 본관을 바꿔 달라는 신청이 법원에 쇄도하고 있다. 올해부터 호주제를 대신해 가족관계등록제가 시행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법원에 변경 청구서를 내고 돌아서는 이들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다. 신청만 하면 바뀌는 요식절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자녀 姓·本 변경 한 달

30대 후반의 여성 A씨. 이혼의 아픔을 딛고 3년 전 재혼가정을 꾸렸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의 성이 ‘김씨’여서 ‘강씨’인 현재 남편 성과 달라 애를 태웠다. 올해부터 성·본을 변경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난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법원을 찾았던 그는 가사사건 접수창구에서 “그게 정말이에요?” 하고 목소리를 높여야 했다.

“성과 본을 바꾸려면 친아버지(친부)의 동의서가 필요하다고요? 그렇다면 호주제 폐지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법원 상담 직원은 “재판부가 친부의 의견서를 받으라고 했다”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집으로 돌아온 A씨는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띄웠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없더군요. 전 남편은 아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아이를 싫어했어요. 10년째 외국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연락을….”

최근 법원을 찾았다가 A씨처럼 실망하고 돌아간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다. 1월 한 달간 접수된 성·본 변경 청구는 6181건. 이 중 법원에서 허가한 것은 208건(3.4%)에 불과하다. 신청 대부분은 재판부가 서류를 첨부할 것을 요구하는 등 검토가 진행 중인 상태. 친부의 동의 여부를 확인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신청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재혼 여성들이 발을 구르는 이유다. “내 아들, 내 딸이 하루라도 빨리 새 아버지와 성이 다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얘기다. 법원에는 “왜 알려진 것과 다르냐” “이러다 새 학년이 시작되면 책임질 거냐”라는 항의 전화가 걸려오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판사들은 왜 서둘러 처리해주지 않는 걸까.
서울가정법원의 한 판사는 “개정 민법에 ‘자(子)의 복리를 위해 필요할 때’라고 규정돼 있는 만큼 성·본 변경이 자녀에게 실제로 좋을지를 종합적으로 따져보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친아버지와 따로 살고는 있지만 자녀와 친하게 지내는 사례도 적지 않아요. 갑자기 성을 바꾸는 게 과연 아이에게 좋을까요. 엄마가 재혼을 했다가 얼마 안 돼서 다시 이혼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아이의 성을 또 바꿔야 합니까.”

이런 우려에 따라 법원별로 가사사건 담당 판사들이 모여 허가 기준을 만들었다. 친부의 동의서, 인감증명서, 어머니와 새 아버지(계부)의 혼인관계 증명서 등을 첨부 서류로 요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지금까지 나온 결정을 보면 친부가 동의했거나 동의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울가정법원이 꼽는 대표적인 허가 사례들을 보자.

#1. 대학 입학을 앞둔 19세. 초등학교 입학 전 부모가 이혼. 지난 10년간 계부와 살아옴. 성이 다른 여동생이 있음. 학교에서 놀림을 받으며 자랐고, 대학 들어가기 전에 성을 바꾸고 싶어 함. 친부의 동의를 얻었음.

#2. 3세짜리 꼬마. 미혼모에게서 태어났음. 친부가 자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아 어머니 성을 따름. 계부 밑으로 입양을 마친 상태.

광주지법 가정지원이 허가한 4건 역시 부모가 이혼한 뒤 친부의 소식이나 주소를 알지 못하는 경우다. 그러나 친부와 자주 만나고, 친부와 함께 사는 친형제 세 명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에 대해서는 신청을 기각했다. “아이에게 더 큰 고통을 줄 수도 있다”는 취지였다.

판사들이 친부와 자녀의 친밀도를 따질 때 중시하는 잣대는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해 왔는지와 자녀와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는지다. 친부와 자녀의 친밀도가 높은 상태에서 친부가 성·본 변경에 반대할 경우엔 양쪽을 불러 직접 의견을 묻는다. 친부가 반대한다고 해서 변경 신청을 기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재혼 여성으로선 전 남편과 대면해야 하는 일이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또 어머니와 새 아버지의 혼인기간이 지나치게 짧다면 변경 여부를 까다롭게 판단하겠다는 것이 판사들의 입장이다. 기간을 정확히 못박기 어렵지만, 1년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이 적지 않다. ▶아이가 계부나 성이 다른 형제와 얼마나 친한지 ▶성이 다른 형제와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지 ▶친부가 사망했을 경우 친가의 제사나 명절 때 참석하는지 ▶변경 청구에 어머니의 ‘보복 감정’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도 들여다본다.

서울가정법원 측은 “자녀가 중학생 이상이면 본인의 의사를 묻는다”며 “초등학교 저학년 등 나이가 어릴수록 허가할 가능성이 커지고, 성년을 앞둔 고등학생에 대해선 조심스럽게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성인이 본인의 성·본 변경을 신청할 때에는 신용조회와 전과조회를 하는 등 엄격하게 심사한다. ‘신분 세탁’의 가능성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여성단체들은 법원의 ‘신중한’ 태도에 대해 반응을 자제하면서도 전향적으로 접근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시행한 지 겨우 한 달을 넘긴 데다, 평가를 내릴 만큼 사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박소현 상담위원은 “친아버지가 동의해주면 아무 고민 없이 처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법원의 친부 의견 요구에 반대하지는 않는다”면서도 “동의 여부에 지나치게 얽매여선 안 된다”고 지적한다.

“친아버지와의 관계도 중요해요. 하지만 현재 있는 자리에서 행복하게 자라도록 해주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와 계부의 혼인기간도 언제부터 실제 동거했는지를 봐야 합니다. 혼인 신고를 한 지 몇 달 안 됐다고 변경 신청을 기각해선 안 되지요.”

성·본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오히려 이혼 가정에 대한 편견을 인정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박소현 상담위원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이지요. 성·본 변경을 폭넓게, 자유롭게 해주다 보면 성이 같고 다른게 중요하지 않다는 인식이 퍼지지 않을까요?”라고 답한다.

마지막으로 퀴즈 하나. 계부 성으로 바꿨을 경우 계부와 친부 중 어느 쪽 상속을 받게 될까. 답은 ‘친부 쪽’이다. 성·본을 변경하더라도 친부와의 법률상 친자관계는 유지된다.

서울가정법원 김영훈 판사는 “자녀의 성·본이 바뀌더라도 가족관계 증명서에는 여전히 친부가 ‘부’로 표시되기 때문에 친족관계에는 변함이 없고, 상속관계도 그대로다”라며 “계부 재산은 상속받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계부가 아이를 ‘친양자’로 입양할 경우에는 재판 확정과 동시에 친아버지와의 법적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 상속관계도 정리되고, 성과 본도 바꿀 수 있다. 김 판사는 “재혼한 여성의 자녀를 진정 자기 자식으로 여긴다면 친양자로 입양할 것을 권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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