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그리운 시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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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호 03면

‘시간은 에누리가 없다’는 말이 점점 실감납니다.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立春)이 내일이고, 그 이틀 뒤는 설이네요. 새해 달력 바꿔 걸고 막 돌아선 것 같은데요. 사정 따라 길고 짧은 연휴를 보낼 채비는 마치셨는지.
지난해 설날이 며칠 지나 소설가 박완서(77) 선생 댁에 갔을 때 일이 생각납니다.

순화동 편지

세배를 올리고 앉으니 미리 준비하신 봉투를 꺼내 일일이 나눠주시는데 여자에게 남자의 딱 두 배를 주시며 하시는 말씀이 이랬습니다. “여자들이 훨씬 애쓰고 사는 때이니 그만큼 더 받아야지요.” 눈이 살짝 안 보이는 예의 그 빙그레 웃음 속에 묻어 보내시는 한마디에 여자 손님들이 모두 박수를 쳤답니다.

‘설’ 하면 또 생각나는 분이 영화감독 김기영(1922~98)입니다. 그러고 보니 2월 5일이 고인의 10주기 날이네요. 김 감독은 설이고 한가위고 영화 생각뿐이었습니다. “내가 지금도 매일 일하거든. 명절 때도 나는 일해. 설 때도 아침에 자식들 세배만 받고 바로 시나리오를 쓴다. 지금 영화화할 시나리오가 서른 권은 넘어. 젊은 사람들 분발해야 돼.” 이러셨답니다.

‘하녀’ ‘화녀’ ‘충녀’ 등 지금 봐도 전위적인 화면이 이해 받지 못할 때, 그는 거침없이 “난 변태거든” 해버렸지요. ‘예술 운운’ 하는 자들에게는 “나는 예술을 하려고 한 게 아니다. 나는 내 취미대로 영화를 갖고 놀았다”고 뼈있는 농을 던졌습니다.

연극연출가 오태석(68)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연극하기 어려운 시대에 목숨 걸고 연극하는 그의 모습을 연극평론가 안치운씨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한눈 팔지 않고 어두운 극장에 갇혀 연극만을 변함없이 해온” “물고기들이 떼 지어 죽고, 환경이 극도로 오염되고, 생명이 문드러져도 끄떡 없는 불모의 이 땅, 그 안에 사는 우리들의 불감증에 침을 뱉는” 기인(奇人).

이 세 분의 작품을 보면 ‘훌륭한 이야기’와 ‘싸구려 이야기’는 굳이 반대편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옵니다. 걸작은 ‘통속에 더한 그 무엇’이 아닐까, 싶은 거지요. ‘그 무엇’이 무엇이냐는 좀 복잡한 논의가 되겠지만요. 전복성(顚覆性)이 한 답이 될까요?

이런 분들을 뭉뚱그려 ‘어른’이라 부를 수 있다면, 지금은 어른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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