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살기’ 빠르게 확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5면

① ‘패스트푸드’처럼 천편일률적인 주택 대신 사는 이의 삶의 질을 높이는 개성적인 집을 짓자는 ‘슬로 홈’ 운동도 활발하다. 사진은 이 운동에 따라 지어진 미국 필라델피아의 주택들.
② 아이슬란드 디자이너 소런 애너도티어가 만든 구슬 시계. 구슬 하나가 5분마다 아래로 떨어져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느림은 ‘친환경’과 통한다.
③ 유기농 면, 재활용 플라스틱 등 환경친화적인 소재를 활용해 만든 미국 생활용품업체 파터리 반의 가구와 쿠션.

미국과 유럽에서 삶의 속도를 늦춰 천천히 인생을 즐기자는 ‘슬로 라이프(Slow Life)’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고 미 뉴욕 타임스(NYT)가 지난달 31일 보도했다.

햄버거·피자 등 패스트푸드를 거부하는 ‘슬로푸드 (Slow Food)’ 운동이 ‘슬로 라이프’라는 생활방식으로 진화해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은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켜 50개국에 8만3000여 명의 열성 지지자를 확보했다.

슬로 라이프의 핵심은 모든 걸 빨리 해치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탈피하자는 것. 삶의 리듬을 늦추더라도 최고의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생활을 변화시키자는 것이다. 이 운동 역시 자연보호를 중시해 주변에서 생기는 환경친화적인 재료를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슬로푸드 운동과 같은 맥락이다.

이 정신은 옷·가구 등 생필품의 생산 방식은 물론 디자인 등 각종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1999년 출범한 관련 단체들의 연합기구인 ‘세계느림기구 (The World Institute of Slowness)’는 슬로 패션, 슬로 쇼핑, 슬로 디자인 등 10여 개 분야로 분류해 보다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NYT가 소개한 네덜란드 디자이너 크리스티엔 메인데르츠마는 슬로 패션의 단적인 사례다. 그는 기계 사용을 거부하고 주변에서 생산되는 털실로 뜨개질해 옷을 만든다. 심지어 농장을 찾아가 어떤 양들의 털로 실이 만들어지는지도 확인한다.

슬로 라이프형 가구들도 여럿 등장했다. 영국 출신 알라스테어 푸아드 루크가 디자인한 역삼각형 바구니는 너무 빨리 물건을 채우려 하면 제대로 공간을 활용하지 못한다는 게 특징이다. 슬로 라이프의 원칙대로 천천히, 차곡차곡 담아야 제대로 쓸 수 있다. 분침과 초침을 없앤 대신 5분마다 구슬이 떨어져 시간을 대충 알 수 있게 디자인한 시계도 있다. 이 밖에 콩으로 만든 스펀지, 유기농 면, 재생 가능 플라스틱 등 친환경적인 재료만을 활용해 물건을 만든다. 제작 시간보다는 제품의 아름다움을 중시해 몇 년씩 걸려 가구들을 만들기도 한다.

슬로 라이프 지지자들은 웹 사이트를 만들고 가두 캠페인도 벌이는 등 자신들의 생활방식을 확산시키기 위해 열심이다. 이미 인터넷에선 ‘slowtravel.org’ ‘slowdownnow.org’ 등 여러 웹사이트가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이달 25일 세상에서 가장 바쁜 도시인 뉴욕에서 황급히 걸어가는 행인들에게 속도위반 딱지를 나눠주는 퍼포먼스도 계획하고 있다.

뉴욕=남정호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