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북녘동포>17.일반列車-콩나물시루에 延着다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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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유일한 장거리 여행수단인 열차는「피난열차」가 되어 버린지 오래다.빵통(객차)은 늘 발디딜 틈이 없다.
연착은 다반사다.심지어 하루 정도 연착도 예사다.그렇다고 그사유를 고지하는 일은 없다.겨울이나 봄의 열차는 더욱 그렇다는것.거의 모든 노선이 단선인데다 선로가 낡아 사고가 잦기 때문이다.1호행사(김일성.김정일부자의 행차)가 있 으면 그 행사가끝날 때까지 관련 노선의 모든 열차는 아무런 고지없이 전면 운행이 중단되기 때문인 것도 한 요인이다.
주민들은 열차여행에서 출장원등이 전하는 바깥소식을 듣는다.열차가「카더라방송」의 주요 매개체 기능을 한다.빵통엔 소매치기와들치기가 날뛴다.여성들은 성추행 당하는 일이 많다.초만원열차속에서 빚어지는 풍속도는 주민들의 삶의 애환을 그 대로 보여준다. ▲초만원 빵통=노동당작전부 개성연락소 전투원 서영철(徐永喆.31)씨가 전하는 열차풍경-.
『열차는 언제나 콩나물시루다.워낙 복잡하다 보니 할머니가 눌려 있어도 신경 써주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다.한번은 임산부가 탔는데 눌린채 움직이지 못해 젊은이 서너사람과 인(人)의 장막을 쳐 구해준 적도 있다.화장실이든 승강대든 어느 곳이나 사람들로 꽉차 뒤늦게 오르는 사람들은 객차 지붕위로 올라가기도 한다.』 그래서 열차가 서면 승객들이 창문으로 오르는 일도 비일비재 하다(김광욱.27).열차에 유리창이 많이 깨져 있는 까닭이다. 徐씨는『유리창이 많이 깨져 겨울에는 무척 춥다』고 말했다.평양~모스크바,평양~베이징(北京)행 국제열차만 난방이 될 뿐 일반열차는 난방장치 자체가 작동되지 않는다.
옛날에는 간첩을 잡으려고 여행증을 발급했지만 지금은 여행객을줄이려고 여행증을 발급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윤웅.29).
열차에 군인전용칸이 있어도 자리만 있다면 일반주민들이 앉는다.경무원(헌병)이 말리지만 워낙 붐비다 보니 막무가내다(허철.
24). 정진만(47.벌목공)씨의 평남 남포~함북 회령 기차여행 체험.
『남포~회령간 열차는 통상 13시간 걸린다.사실상 이틀이 걸리는 수가 많다.한번 갈아타야 하는데 도착과 출발시각이 일정치않아 기다리는 시간이 더 많다.』 여름에는 덜하지만 연착은 흔한 일이다.겨울에는 5~6시간 연착이 기본이라고 할 정도며 심지어 24시간 연착도 있다.회령에서 외부로 나가는 노선은 4개지만 겨울에는 통상 한개 노선이「출발시각 미정」이란게 귀순자들의 증언이다(황광철. 21,박수현.28).
따라서 열차는 출발지부터 만원이고 좌석에 앉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김영성.61).
열차안에선 자리다툼을 벌이다 싸움도 많이 벌어진다.담배를 뺏거나 칼을 꺼내 위협하는 경우도 많다.먼길을 떠나는 여행객들은지독한 냄새및 빈대와도 싸워야 한다(이정철).승객들은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챙겨 열차에 탄다(김영성).
▲통근열차=통근열차를 이용하는 출퇴근자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아니다.통근열차의 만원사태는 더 말할 것도 없다.일부 젊은이들은 열차가 도착하면 으레 객차지붕위로 올라가기도 한다(윤웅).
특히 공장이 밀집해 있는 해주~만포,함흥~사포구역~마전 통근열차는 60년대 서울의「콩나물 출근버스」를 연상하면 틀림없다.
사람들은 열차에 가득 붙어 매달려 간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김형만.21.가명,이정철.27).
함흥시 출신 여만철씨의 증언.
『함흥~신상,함흥~고원간 통근열차가 있다.함흥~서호간은 빽빽이차(디젤 증류차)인데 아침에 두번,저녁에 두번 운행한다.이 지역은 당국에서도 내놓고 있는 상태다.늘 만원이다 보니 단속도할 수 없다.』 ▲소매치기.들치기의 터전=빵통칸은 밤이 돼도 등불이 들어오지 않기 십상이다.전노선의 빵통에 전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설사 전구가 있더라도 없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전압이 약해 불빛이 매우 흐릿하기 때문이다.소매치기들과 들치 기들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이 되고 있다.
열차 들치기들은 짐을 옮겨 주는 척하며 봇짐이나 배낭을 슬쩍가져가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소매치기들은 현금과 시계를 주로 노린다.들치기에 익숙한 승객들은 열차에 오르면 물건끼리 서로 묶거나 배낭을 끈으로 선반에 매두는등 각별한 신 경을 쓴다.물건을 조금 떨어진 곳에 두거나 잠을 자면 금방 없어진다는 것을잘 알기 때문이다(고청송.34).
들치기들의 수법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최근에는 혼잡한 틈을 이용해 배낭끈을 잘라내고 통째로 가져가는 경우가 늘어났다.
사람들은 보복이 두려워 그런 현장을 보고도 못본체 한다.
황광철씨는『열차안에는 면도칼로 주머니를 째고 훔쳐가는 소매치기가 많다』며『소매치기들은 옆에서 이를 알고 제지하면 그 사람의 주머니도 털고 주머니에「주둥이 값」이라고 쓴 쪽지를 남긴다』고 말했다.
윤웅씨의 증언-.
『배낭도둑은 대여섯명이 한조인데 한명이 배낭을 잡으면 다른 한명이 배낭끈을 잘라내고 뛰는 식이다.배낭도둑이 얼마나 많은지열차안에서는 배낭은 없고 배낭끈만 남아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선반에 끈을 묶어 두어도 소용이 없다.경성 .평양.함흥 역전은 플랫폼이 높아 열차 밖에서 손을 들이밀어 열차 선반에 놓인 배낭을 가져가기도 한다.』 허철씨의 증언-.
『버스에도 통근열차처럼 소매치기들이 들끓는다.승객들은 현장을보아도 보복이 두려워 바로 말하지 못한다.소매치기들은 2~3명씩 몰려다니며 역전주변이나 길바닥에서 생활한다.남의 물건을 전문적으로 터는 소매치기들은 꽃제비,남의 것을 얻 어 먹는 거지는 산제비라고 한다.』 여성들은 빈발하는 성추행에도 시달려야 한다.다리나 젖가슴을 만지는 정도는 툭하면 일어나는 데다『있을수 있는 일』이라는 분위기 탓에 사건화되지도 않는다(박수현.황광철). ▲열차원의 위세=열차원과 친하면 자리를 얻거나 침대칸을 얻어탈 수 있어 요령있는 사람들은 열차원과의「사업」에 신경을 쓴다.
『청진광산 금속대학 재학중 실습나가며 열차원을 알게돼 여행때는 열차원방을 이용하곤 했다.열차원 방에는 2층 침대가 있다.
다른 사람들도 열차원에게 뇌물을 주고 친해진뒤 열차원 근무날짜에 맞춰 일부러 그 열차에 타는 경우가 흔하다』( 윤웅).
외화벌이지도원으로 자주 열차여행을 한 김명철씨의 경험-.
『열차마다 1~2량의 침대차를 달고 다닌다.침대차 한방은 2층 침대가 양쪽에 있으므로 4인용이다.침대차는 안전원이 지키므로 일반주민은 들어갈 수 없다.상좌이상 군관이거나 정치국원,비서국 비준대상인 군당 책임비서급 이상,군행정위원장 ,도 처장급이상이 이용대상이다.이들은 출발전 역장에게 전화해 침대차를 이용하지만 열차원과 친하면 비어있는 침대차를 이용할 수도 있다.
』 침대차를 매단 열차에는 객차 1량에 외화매대가 있다.밀차도있는데 밀차에는 음료수.곽밥등이 있다(윤웅).87년부터는 식당열차 안에서도 양권제를 실시한다.
▲무임승차와 단속=주민들은 만원의 어수선한 분위기를 이용해 열차를 공짜로 타고 내리는 경우도 많다.기차표를 끊기 위해서는여행허가증이 필요하므로 허가증 없이 다니는 것이다.물론 허가증이 있어도 기차표를 사기는 힘들다.기차표를 사려 면 이틀 정도기다리는 것이 예사라는 것(정진만).
서영철씨는『여행증 없이 다니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안전원들도단속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박수현씨는『대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기차표를 끊지 않는다』며『나 역시 기차표를 끊고 열차를 타본 기억이 없다』고 증언했다.
여행증 없이 열차를 타고다닌 서영철씨의 체험-.
『안전원은 민간인만 단속하고 경무원은 군인만 단속한다.안전원이 오면 계급장을 보여줘 피하고 경무원이 오면 민간인 복장으로해 피하곤 했다.단속이 정도를 넘어 심하고 뇌물로 쓸 담배마저없으면 지붕위에 올라가 피한다.』 열차가 평양근처에 도착하면 단속은 엄격해진다.이와함께 단속을 피해 달아나는 승객들도 줄을잇는다. 서씨의 계속된 증언-.
『개성과 평양등 특수지역 여행허가증은 사선이 쳐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시돼 있다.여행증에 줄이 한개 있으면 개성,두개 있으면 평양을 통과하거나 들어갈 수 있다.사리원이나 황주쯤 도착하면 안전원이 사람들을 밀쳐내며 단속을 강 화하므로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다.기차가 35~40㎞로 달릴 때 뛰어내렸다가 다음 열차가 오면 타곤 한다.』 황광철씨도『열차속도가 느려뛰어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며『단속에 걸려 적발되는사람은 드물다』고 말했다.
***의자밑에 숨기도 다음은 황씨의 경험-.
『단속이 시작되면 뛰어내리지 않더라도 의자 밑에 숨는 경우가많다.도둑열차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사람들은 이런 풍경에 익숙하다.주위에서「대남공작대 훈련하는군」이라며 숨겨주는분위기다.』 ▲툭하면 고장=객차는 전압의 불안정성과 시설의 노후로 고장이 잦다.
만포시 객화차대 물자조달원 이철수(李哲守.39)씨는『차량이 낡아 정시운행이 힘들고 철도사고가 잦다』고 말했다.특히 함라(함흥-나진)선은 일제시대 레일에다 전반적으로 침목이 썩어 시설불량 사고가 많다(정진만).
화물열차도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채탄공 황광철씨의 증언-. 『석탄을 캐 놓아도 수송이 안된다.툭하면 열차고장이라고 한다.3년 수명인 베어링을 10년씩 사용하는 데다 기관차는 1.
5t급 화물객차를 20개씩 매달고 다녀 항상 무리한 운행을 하기 때문이다.』 열차동력은 대부분 전기지만 전기공급이 충분치 못한 것도 고장과 연착의 커다란 원인이다(김선일.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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