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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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침실 아닌 곳에서 정사를 갖는 것은 난생 처음이다.
커튼으로 가려져 있긴 해도 한나절의 볕 기운은 리빙 룸을 부드러운 마른잎 빛깔로 물들이고 있다.무르익은 석류(石榴)같은 장작불이 아리영 아버지의 모습을 환히 드러내 보여준다.
정성을 다하여 조타(操舵)하는 선장의 표정이다.
미덥고 사랑스러웠다.
선장을 조인다.
신음하듯 탄성을 올린다.선장은 어느새 반인(半人)반수(半獸)의 켄타우로스가 되어 있다.켄타우로스는 머리에서 허리까진 인간이고 하반신(下半身)은 말 모습의 그리스 신이다.
켄타우로스를 조인다.
『우리 결혼합시다.떨어져서는 도저히 못 살 것 같소.』 켄타우로스가 절박한 목소리로 토해내듯이 말했다.
절정(絶頂)의 벼랑을 가며 길례는 귀를 의심했다.
결혼? 결혼이라 했는가.
환희로 찬 채 길례는 무중력 상태로 들어갔다.어머니의 눈은 오늘도 보이지 않았다.
결혼-.
길례의 경우 그것은 이혼을 전제로 한다.지금의 혼인관계를 우선 청산해야 하는 것이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비록 가당치 않은 일이라 하더라도 결혼하자는 말은 엄청난 희열을 길례에게 안겨 주었다.승리감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무엇에 대한 승리감인가.
아리영 아버지는 난로 옆 흔들의자에 걸쳐둔 모헤어 담요를 들고 와 길례를 감싸 안았다.
『시몬,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이 오라.우리도 언젠가는 가여운 낙엽이 되리라, 가까이 오라.벌써 밤이 되고 바람은 우리를 휩쓴다, 시몬,너는 좋으냐낙엽 밟는 소리가.』 구르몽의 『낙엽』이다.
아리영 아버지는 「가까이 오라」구절을 되뇌며 다시 말했다.
『우리 결혼합시다.가여운 낙엽이 되기 전에 한 지붕 밑에서 함께 삽시다.』 -가까이 오라.우리도 언젠가는 가여운 낙엽이 되리라. 길례는 눈물을 머금었다.
『구르몽은 그의 수상록에서 무서운 말을 했어요.단지 소원하는것만으로 그 일이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 남편들은 남아나지 않으리라는 겁니다.저마다 남편 죽기를 한두번쯤 소원해보지 않는 아내가 없다는 얘기지요.
저는 그런 남편은 되지 않을 겁니다.
자녀 두분 결혼시키신 다음 이혼수속을 합시다.사실은 이 말씀드리려고 서울에 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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