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미로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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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그러고 보니 여자는 왼손에만 장갑을 끼고 있었다.다른 한 손은 손가락으로 묘하게 둥그런 원을 그리고 있는 게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듯 여겨졌다.강태구는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이느껴졌다.이제 미로찾기가 시작된 것이다.강태구는 머리라도 식힐양으로 파란 하늘을 바라봤다.차가운 하늘 저쪽에선 검은 뭉게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왠지 기분이 서늘하군.마치 저 차가운 먹구름이 금세 땅위에라도 내려올듯이….』 강태구는 이제야 자기가 왜 이 현장까지 와야 했는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변시체가 발견되었다는소식을 들은 것은 정오가 갓 넘어서였다.막 점심을 먹으러 나가려는데 여인의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강태구는그냥 아랫사람들에게 맡기고 나가려 했으나 갑자기 불안해지면서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다.단순히 유기된 시체일지 모르는데도 강태구가 직접 현장확인에 나선 것은 바로 그 불안 때문이었다.오랜 형사 생활을 통해 얻은 본능적인 감각은 바로 불안 에서 시작됐다.불안할 땐 움직여야 한다.무언가 사건 해결에 대한 계시가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불안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면 대개는 일을 그르친다.범인을 과학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불안의 끄나풀로 잡는 것이다.그것이 강태구가 오랜 세월 범인을 검거하면서 체득한 방식이었다.
이 사건은 뭔가 심상치 않다.그리고 마음 속의 불안이 뭔가 복잡해 지는 게 차츰 자신감이 떨어지는 것도 느껴졌다.왜 이럴까?내가 늙고 약해졌기 때문일까.그러나 강태구가 늙어서 그러한것이 아님은 곧 현실로 다가왔다.그 후 3명의 정신과 의사가 연쇄적으로 살해됐기 때문이다.매스컴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이 사건은 경찰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사건 현장에 시를 한편씩 남겨놓곤 했다.그들 시는 연작시로 보였는데 이러했다.
『쓸쓸한 저녁 왠지 가슴이 스산해지며 뭔지 모르는 슬픔과 허무함이 가슴을 저리게 차오는 순간이 있다.뚜렷이 슬프고 허무한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가끔씩 나를 휩싸고 도는 이 아픔은 쉽게 가시지가 않는다…기나긴 잊음의 시간은 지나고 마주보아도 느낄 수 없는 운명은 메마른 영혼의 숲속에서 알모르는 감상의 늪으로 날 인도한다.
내 손바닥을 스쳐가는 영혼의 뿌리는 뒤늦게 움켜쥐는 손아귀를빠져나가고 가슴속은 갑자기 스산해지며 바닥이 없는 공허감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암흑같이 휩싸고 도는 이 진한 아쉬움과 기다림,슬픔과 공허!이 감상의 늪에서 나를 건져줄 사람은 그 누구인가? 이 외로움으로부터 나를 구해줄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그러나 사건은 의외로 손쉽게 풀릴 수 있을 것 같았다.주미리의부검 결과 사건 용의자가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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