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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팔 없어도 내 그림은 훨훨 날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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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석창우 화백은 두 팔 대신 의수 끝 갈고리로 그림을 그린다. 즐겨 다루는 소재는 축구를 비롯해 몸 움직임이 극렬한 스포츠. 감전 사고를 당한 뒤 오히려 “마음이 원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는 그가 이번엔 경륜을 다룬 그림에 도전했다. 2월1일부터 경기도 광명시 경륜경기장에서 전시회가 열린다. [사진=박종근 기자]

팔 없는 화가 석창우에게 인간의 몸은 영원한 주제다. 마르지 않는 영감의 샘이기도 하다. 의수 끝 갈고리로 붓을 다뤄온 그는 축구선수의 드리블부터 레슬링선수의 힘겨루기까지, 몸의 역동성이 드러나는 스포츠에 매료됐다.

그런 그가 2월1일부터 경륜을 주제로 개인전을 연다. 4월에는 중국 현지 갤러리의 초청을 받아 베이징에서 올림픽 주제의 개인전을 열 예정이다.

서울 대방동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체크무늬 남방 끝, 손가락이 있을 자리에 달린 두 갈래 갈고리는 일반인에게는 낯설다. 그러나 그의 따스한 눈웃음과 소탈한 몸짓은 이내 어색함을 녹였다.

두툼한 두 개의 갈고리는 붓을 잡기에 최적의 각도로 조절이 되어 있다고 했다. 다른 일을 할 때 불편하지 않은지 물어봤다. “밥이야 하루에 두 번 먹으면 되지만, 작업은 하루 종일 하니까요. 이게 편해요.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못 견디겠거든요.”

공대를 나와 전기공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그가 공장에서 감전 사고로 두 팔을 어깨부터 잃어버린 것은 1984년. 상심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아내가 지나가는 듯이 말했다. “의수를 달면 당신이 좋아하는 낚시도 할 수 있대.” 곧바로 가서 의수를 했고, 조금씩 희망이 생겼다. 열심히 연습하니 네 개의 갈고리도 쓸 만했다.

그러던 그에게 이번엔 어린 아들이 다가왔다. “아빠, 나 그림 공부를 해야 하는데, 엄마가 아빠에게 도와 달라고 하랬어.” 뭘 해줄 수 있을까 싶었다. 조금 망설이다 아들이 가져온 자그마한 연습장에 새를 그리기 시작했다. 날개가 있어 어디든 활활 마음껏 갈 수 있는 새. 아들은 아버지가 조금씩 채워가는 연습장 한 귀퉁이에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렸다. 연습장이 너덜너덜해져가면서 석 씨의 자신감은 커져 갔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원광대 여태명 교수를 찾아가 서예를 배웠다. 다시 손으로, 아니 의수로, 뭔가 창조해낼 수 있다는 재미가 쏠쏠했다. 붓을 제법 놀릴 수 있게 될 무렵, 크로키를 배워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곧 누드 크로키를 시작했고, 몸이라는 주제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내친김에 ‘서예 크로키’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먹과 붓으로 사람의 움직임을 크로키 형식으로 그려내는 작업이다. 사람의 몸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이런 관심은 자연스레 스포츠로 이어졌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축구를 주제로 미국·스위스· 이탈리아·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전시를 했다.

이번 경륜관련 전시는 통산 20회 개인전이다. “소재가 사람이다 보니 그림이 풍년이에요. 그리고 싶은 게 너무 많거든요.”

경륜은 속도가 생명인 스포츠다. 국민체육진흥공단 경륜운영본부로부터 의뢰를 받기 전까지, 경륜은 그에게 생소한 분야였다. 쉬운 말로, 느낌이 안 왔다. 지난해 2월부터 매주 주말, 지하철을 타고 광명에 있는 경륜 경기장에 가서 무턱대고 경기를 봤다. 10개월이 지나자 비로소 그림이 나오기 시작했다.

“선수들이 그 빠른 속도로 서로 흩어졌다 합쳐지면서 선두를 다투는 게 매력적이었죠.” 전시는 3월2일까지 광명의 경륜경기장에서 계속되며, 매주 월·화요일과 설 연휴는 휴관이다.

경륜 다음엔 무엇일까? 피겨 스케이팅의 아름다운 선을 표현해보고 싶어 김연아 선수 관련 자료를 모으고 있다고 했다. “재미를 느끼니까 할 수 있었던 거에요. 결국, 모든 건 마음먹기에 달려있더라고요. 지금 와서 생각하니 어려움이 있었기에 이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거 같아요.”

마음이 원하니 몸도 되더라는 석창우 화백. 그가 자신을 칭하는 이름은 유빙(流氷), 떠다니는 빙산이다. “몸은 불편할지 몰라도 유유히 흘러다니는 자유로운 빙산과 같은 존재이고 싶네요. 자유롭게…”

 글=전수진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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