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귀에는 익숙하지만 손길 안닿는 책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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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고도 다 아는 척, 내용을 훤히 꿰는 양 하게 되는 책들이 있다. 이른바 명저(名著)다.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이런 운명을 타고난 책이다. 워낙 널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데다 당위(當爲)의 냄새가 너무 진해서 지레 제쳐두게 만드는 이런 책 스물일곱권을 모았으니 이 책이야말로 책 중의 책이라 할 만하다.

미국에서 도서관학의 대가로 꼽히는 로버트 다운스(1903~91)는 1956년 이 책(원제 '세상을 바꾼 책들')을 내면서 한마디 했다.

"영어에서는 책을 쓴 저자의 이름을 딴 형용사나 명사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보면 그 책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안(권모술수에 능한), 코페르니컨(천지가 뒤바뀔 만큼 획기적인), 뉴터니안(뉴턴의 학설을 신봉하는 사람)…저자들은 급진주의자, 혁명주의자, 선동가들이다. 책이 얼마나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무기인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등 서양사 2000년에서 선정된 책들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그 책 속에 담긴 사상과 이론의 영향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종의 푯대다. 소로의 '시민의 반항'은 인도 독립을 이끈 간디를 움직였고,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흑인 노예를 해방시켰다.

다운스가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빨갱이 사냥(매카시즘)으로 도서관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 한복판에서 '읽을 자유'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었던 저력이 이 책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열정에서 나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명저 다이제스트가 아닐까 라고 만만하게 볼 수 없는 책인 까닭이다.

옮긴이는 이 책들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주범을 교과서로 지목하고 튀는 제목을 달았는데 그건 교과서를 두번 죽이는 일이지 싶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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