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같은 70년대의 ‘벼락같은 축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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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한국사회에 기품 있는 사람도 많았고 비판정신이 강한 사람도 많았지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춘 이를 찾기는 어려웠다. 그는 ‘기품 있는 비판정신’을 대변한 이였다.”(강준만 전북대 교수)

 “그이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 자기 영정을 고를 수 있는 자격이 확실한 사람이다.… 아름답거나 추함을 넘어서 이미지가 풍기는 느낌 같은 것을 파악하는 주관이 확실한 사람이었다.”(사진가 강운구)
 
 현대 한국 잡지사의 거목 고 한창기(1936-1997)씨를 두고 한 말들이다. 그와의 추억을 회고하는 특이한 형식의 책이 『특집! 한창기』(창비)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됐다. 한씨가 생전에 만든 잡지 ‘뿌리깊은 나무’ ‘샘이깊은 물’ 등을 통해 한씨와 인연을 맺은 이들이 각기 저마다의 각별한 추억을 하나씩 풀어냈다. 사진가 강운구씨를 비롯해 우리 사회 각 방면에서 뚜렷한 족적을 새겨가고 있는 59명의 공동 저자들은 모두 한씨와의 만남과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자신들의 내공을 쌓았노라고 속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공동 저자들뿐만아니라 70~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 중 ‘뿌리깊은 나무’의 독특한 편집을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뿌리깊은 나무’는 1976년 3월 창간호를 냈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 폐간당했다.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시대에 지성계를 풍미했던 잡지들인 ‘창작과비평’‘문학과지성’과는 또 다른 위치에서 ‘뿌리깊은 나무’는 수많은 젊은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표지부터 과감하게 눈에 띄게 실은 사진들 때문만이 아니라 ‘뿌리깊은 나무’만의 독특한 문화적 분위기가 독자들을 유인했다.

 무엇보다 판소리 등 전통 문화를 품위있게 복원하는데 앞장선 잡지가 ‘뿌리깊은 나무’였다. ‘토박이 문화’에 대한 관심은 발행인 한씨가 창간사에서 밝힌 이래 ‘뿌리깊은 나무’ 전호를 관통하는 키워드였으며, 1984년 창간된 ‘샘이깊은 물’에도 이어지는 정신이었다. 우리 것이 천대받던 시절 우리 것에 품위를 입히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강준만 교수는 “‘뿌리깊은 나무’의 이데올로기가 있다면 그건 ‘우리 것 사랑하기’가 아닌 ‘우리 것에 대한 제대로 된 감상’이었다”고 평가했다.

 형식면에서도 한글 전용주의와 가로쓰기를 도입해 새로운 언론출판 문화를 선도했다. 이같은 ‘뿌리깊은 나무’의 편집 정신이 문화 그 자체에만 매몰된 것은 아니었다. 유신독재를 겨냥한 저항의 목소리가 문화 비평의 저변을 흐르고 있었다.

 한림대 유재천 교수는 ‘뿌리깊은 나무’의 성격을 이렇게 평가했다.“어떤 사람들은 권위주의의 억압 속에서 ‘뿌리깊은 나무’가 한가하게 문화 얘기나 하고 있다고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같은 비난은 이 잡지의 겉모양만 보고 하는 말들이었다. …대놓고 큰 목소리로 권위주의 체제를 비판하지는 못했을 지라도 글의 구석구석에서 유신독재를 비판하고 변혁을 꾀하는 목소리를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내었다.… ‘뿌리깊은 나무’는 70년대 문화사적 변혁운동의 주인공이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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