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만 시켜 주시면 무슨 일이든 할게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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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서울 중구의 동국제강 본사 2층에는 신입사원 면접을 기다리는 10여명이 앉아 있었다. 남자들은 하나같이 짙은 감색 계열의 양복을 입었고, 여자들은 하얀 블라우스 등 정장 차림이다. 무려 250대 1의 경쟁에 도전한 입사 지원자들이다.

대기실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한 지원자는 한쪽 구석에서 뭔가가 적힌 수첩을 꺼내 들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암기하고 있었다. 면접에 대비한 사항을 정리해 놓은 노트라고 했다.

"피… 피는 얼마든지 뽑을 수 있습니다. 합격만 시켜주신다면야…."

지원자 車모(27)씨의 말이 정적을 깼다. 혼잣말로 "이 회사는 발표 전에 피를 안 뽑네"라고 한 것을 들은 인사팀 관계자가 "피가 아까워요?"라고 되묻자 당황한 것이다. 이번이 세번째 최종 면접인 그는 이전에 지원한 회사에서는 합격자 발표 전에 신체검사를 위해 피를 뽑았던 것을 떠올리며 그런 소리를 했던 것이다. 그는 이전 두번의 면접 때는 피만 뽑고 불합격됐다.

명문 사립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전모(27)씨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30군데의 회사에 원서를 냈다.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을 목표로 했지만 면접만 여섯번 떨어졌다. 그는 "서류에서 떨어지면 아예 기억이 안 나니 차라리 편하다"며 "면접비(최종 면접 때 받는 교통비) 모아서 재벌 되겠다"며 씁쓸해했다. 이날 면접에 참가한 지원자 중 상당수는 전씨와 같이 수십곳에 지원했다가 떨어진 경험을 갖고 있다.

청년 실업이 심각한 가운데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 같은 일을 흔히 겪고 있다. 동국제강의 경우 지난달 26일 20명의 신입사원을 채용하기로 하고 모집공고를 냈다. 그러자 서류 접수 마감일인 지난 3일까지 무려 5066명이 제출했다. 사상 최고인 25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 것이다.

회사 인사팀이 한달간의 작업 끝에 지난 10일 서류 합격자 78명을 선정했다. 서류 심사 때부터 지원자들의 경쟁은 치열했다. 인사팀 관계자는 "회사 내부에서도 잘 모르는 사업 프로젝트를 어떻게 알았는지 이에 참여하고 싶다고 호소하거나, 인사팀에 따로 자신을 소개하는 e-메일을 보내는 지원자도 많았다"고 말했다.

이날 면접 시험에는 서류 합격자 중 25명이 빠진 53명만 참석했다. 다른 회사에도 합격한 사람들이 빠졌기 때문이다.

동국제강은 지난 25일 당초 계획보다 많은 31명을 최종 합격자로 발표했다. 인사팀 관계자는 "인재들이 많고 회사의 상황이 나쁘지 않아 선발 인원을 늘렸다"고 말했다. 車씨도 합격자 명단에 포함됐다. 면접에 참여했던 한 임원은 "요즘 경쟁률이었다면 나는 못 들어왔을 것"이라며 "요즘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잡기 위해 너무 고생한다"고 말했다.

김승현 기자, 윤나경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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