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게이머들도 땅 위를 밟고 산답니다!

중앙일보

입력

칼바람이 매섭게 불던 날, 서초구 방배동 서래마을에 위치한 MBC 게임단 HERO의 연습실을 찾았다. 컴퓨터 앞에서 조용히 컴퓨터 게임만 하던 프로 게이머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왁자지껄하다. 오늘 오후에는 MBC 게임단 선수들이 모여 산책을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MBC 게임단은 10여개의 프로 게임단 중 현재 2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명실상부 최고의 팀이다. 김현석 코치(35세)의 진두지휘 아래 매일 아침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숙소에서 연습실까지 출·퇴근을 한다. 출·퇴근 거리는 10분 이내로 얼마 멀지 않지만 대부분의 게임단들이 같은 공간에서 숙식과 연습을 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셈이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대충 해결하고 모니터 앞에서 하루 종일 게임을 하다가 저녁 겸 야식 겸 때를 놓친 식사를 한 뒤 새벽까지 또 모니터에 코를 박고 있으려니…. 하지만 이런 생각은 편견에 가득 찬 지레짐작일 뿐이다.
김 코치에 따르면 일부러 숙소와 연습실을 분리해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갖고 연습하는 동안 집중도를 높이도록 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셈이 되는데, 이를 통해 어린 선수들에게 게임도 하나의 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선수들은 아침, 저녁으로 숙소와 연습실을 오가고, 근처 학교 운동장으로 간단한 운동을 하러 나가기도 한다. 이런 생활에 어느덧 익숙해졌는지 5층 숙소까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계단으로 오르는 선수들도 있다. 따로 운동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축구, 헬스, 걷기 등등 다양한 방법으로 몸 관리를 하기도 한다.

팀 내에서 가장 게으르다는 프로 게이머 김택용(20세) 선수도 “숙소에서 연습장까지 걷다보니 게으른 생활패턴이 바뀌어 지는 것 같다. 가볍게 몸도 풀 수 있고 복잡한 머리를 정리할 시간이 생기는 것 같다.”고 말한다.
간단하게라도 산책을 나서거나 운동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분모는 스트레스와 건강관리. 17인치의 작은 화면에 눈을 대고 있으면 엄청난 피로가 쌓인다. 아직은 젊은 혈기로 버틸 수 있지만 지금부터 지속적으로 관리를 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게임 선수로 활동하기에는 체력이 금방 소진될 수도 있다.
이날의 산책코스는 반포둑길이었다. 선수들은 추운 날씨 속에 옷을 여미며 걷는다. 프로 게이머라는 특수 직업인지라 선수들은 3.3㎡ 평방미터 남짓한 개인공간에서 7~8시간 이상을 컴퓨터를 보고 있노라면 다리도 저리고 눈이 시큰거리기 일쑤다. 김 코치는 “하루 종일 밀폐된 공간 안에서 생활하는 선수들의 몸 관리를 위해 매일 30분씩은 의무적으로 걷도록 하며 날씨가 좋은 날은 인근 초등학교 인조 잔디 운동장에서 축구로 몸을 풀기도 한다.”고 말했다.

MBC 게임단에서 가장 맏형인 박지호(24세) 선수의 얘기도 귀 기울일만하다.
“거친 운동과 헬스보다는 걷기가 좋아요. 축구는 한번 넘어지면 손이나 팔, 다리가 다치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헬스는 제가 팔 근육을 키우다 보니 팔 움직임이 둔해져서 게임을 할 때 지장을 주죠.”
박 선수에게 산책시간은 게임전략 시간이다. 박 선수는 걷다보면 거리의 사물과 사람들이 테란이 되고 프로토스가 된다고 한다.

“저는 걸을 때도 그냥 재미로 게임에 연결해 생각해요. 계속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만 하고 있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웃음)”
걷기만큼 즐거운 운동이 없다고 나선 염보성(19세) 선수는 어린 선수답지 않게 팀내 걷기 예찬론자다. 염 선수는 자유시간이 생기면 따로 혼자 나와 서래마을의 인근 공원을 혼자 걷는 시간을 마련한다. 걸으면서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거나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염 선수는 “걷기가 신체적으로도 무리가 가지 않고 시합 전에 운동을 하더라도 쉽게 지치거나 몸이 힘들어지는 운동이 아니라서 혼자 사색하면서 산책하는 것이 가장 즐겁다.”고 말했다.
컴퓨터 화면 바깥에서 두 발에 의지해 자신의 현실과 꿈을 말하는 어린 선수의 쑥스러워하면서도 다부진 표정이 인상적이다.

정유진 객원기자 yjin78@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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