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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도마복음서는 언제 집필되었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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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 33면

마가복음 2장에 재미있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며칠 뒤 예수께서는 다시 가버나움에 가셨다. 예수께서 집에 계시다는 말이 퍼지자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마침내 문앞에까지 빈틈없이 들어섰다. 그때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고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요에 눕힌 채 예수 앞에 달아 내려보냈다.”(막 2:1~4). 카즈린 마을의 가옥구조를 보면 이 장면이 실감나게 재현될 수 있다. 내가 지금 앉아 있는 곳이 옥상인데 쉽게 올라갈 수 있다. 내 앞에 거적이 덮인 곳이 있다. [임진권 기자]

야고보는 예수의 형이었고, 예수 사후 예루살렘교회를 주도해 나갔으며 27편 중의 하나인 야고보서의 저자라고 했다. 물론 야고보는 전통적 설대로 예수의 네 남동생 중 맏이일 수도 있다. 유다는 예수의 쌍둥이 동생으로, 도마복음서를 지었고, 또 정경에 편입된 유다서의 저자라는 설도 있다(유 1:1). 뿐만 아니라 인도 사람들은 예수의 쌍둥이 동생인 그 도마가 남인도에 와서 교회(Mar Thoma Church)를 개척했다고 믿고 있다. 도마를 초대교황으로 모시는 3000만을 넘는 방대한 기독교 인구가 있다. 뿐만 아니라 요세, 시몬, 그리고 최소한 두 명 이상의 여동생들이 있었다(막 6:3, 마 13:55). 누가복음 설화에 의하면 세례 요한도 예수와 이종 간이다. 예수의 엄마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와 요세의 엄마 마리아, 베다니의 마리아, 제베데의 부인 살로메, 그리고 그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하여튼 이 모든 사람이 예수 집안과 관련되어 있으며, 예수운동(the Jesus Movement)의 재임(齋任)과도 같은 후원자들이었다.

노자(老子)와 도마복음서

예수시대의 올리브기름 프레스기. 올리브를 볶아 동그란 삼태기에 넣고 나사를 지렛대로 돌려 짠다. 올리브기름은 식용도 되고, 약용도 되고, 등잔용도 되고, 정화 제식용도 된다. 예수시대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생필품이었다. 올리브를 심으면 척박한 땅이 오히려 비옥해진다. 올리브의 확보는 부의 기준이었다.

초대교회사에 있어 예수 패밀리의 이름들은 추종자들의 관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예수설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예수 가족의 다양한 전승은 매력적 주제였다.

그러한 환상은 최근의 『다빈치 코드』에까지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도마복음서는 과연 언제 집필되었을까? 모든 학문적 활동은 기실 알고 보면 선이해(先理解, pre-Understanding)에 의해 지배당하는 측면이 있다. 도마복음서의 저성(著成) 연대를 운운케 되면 정경의 권위를 훼손하고 싶어 하지 않는 학자들은 당연히 현 4복음서보다 도마복음서가 먼저 성립했다는 설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4복음서 중에서 가장 빠른 마가복음이 AD 70년경이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도마복음서가 AD 70년보다 선행하는 작품이라는 설을 용인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학문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감정일 수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은 도마복음서는 정경의 가치가 없는 외경이며, 빨갱이 같은 이단자들인 영지주의자들의 불경스러운 작품이며, 3·4세기경의 날조라고 치지도외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치지도외해 버릴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미안하게도 도마복음서의 내용은 절반 이상이 직·간접적으로 현행 정경 복음서의 내용과 겹친다. 구체적으로 공관복음서와 도마복음서는 70개조 이상의 병행관계가 있다. 그러니까 도마복음서를 외경으로서 부인하는 것은 곧 공관복음서를 외경으로서 부인하는 꼴이 되고 만다. 그리고 만약 도마복음서를 영지주의 문서라고 간주하게 되면, 영지주의 그 자체를 정경 복음서의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도마복음서의 내용은 현행 공관복음서의 내용과 사상적으로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조금도 이단적이거나 기독교의 권위를 훼손하는 불경스러운 내용을 포함하지 않는다. 기실 도마복음서의 출현은 영지주의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이나, 영지주의를 하나의 독립된 뚜렷한 실체로서 간주하는 오류를 불식시켰다. 영지주의는 실체화(reification)의 대상이 아니다.

이러한 고민을 안겨주는 상황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대안이 ‘짜깁기설(a compositional theory)’을 주장하는 것이다. 짜깁기설이란, 도마복음서의 저자가 이미 공관복음서를 손에 들고 있었으며, 그것들에서 예수의 말씀을 여기저기 적출해내 도마라고 하는 캐릭터에 맞게 짜깁기해 놓은 책이 곧 도마복음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설의 가능성도 전적으로 부정된다고 말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이 입증되려면 단일한 한 사람의 저자가 기존의 공관복음서를 자기의 이념에 맞게 선정, 개조, 변조해나간 어떤 체계가 입증되어야 할 텐데 이러한 입증은 현실적으로 엄청난 난관에 부딪힌다.

보통 우리는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노장사상(老莊思想)이라고 부른다. 노자(老子)라는 『도덕경(道德經)』을 쓴 사상가가 있었고, 그 사상가의 질박하고도 오리지널한 생각을 장자(莊子)라는 사상가가 풍요롭게 발전시켜 『장자』라는 은유와 비유로 가득 찬 서물을 성립시켰다고 보기 때문에 노장사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근세에 치엔무(錢穆)라는 대학자는 그의 해박한 역사지식을 활용하여 『노자』가 『장자』에 나타난 노자적 생각을 짜깁기하여 만든 것으로, 『장자』보다 후대에 성립한 서물이라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노장사상’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장노사상(莊老思想)’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의 유명한 저서가 『장노통변(莊老通辨)』이다.

그렇다면 『장자』 속에 인용되고 있는 노자 즉 노담(老聃)은 누구일까? 공자가 직접 찾아가 알현하였다는 노담, 혹은 노래자(老萊子)는 전설 중의 인물일 뿐, 현존하는 『도덕경』의 저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치엔무는 『도덕경』에 나오는 도(道)·명(名)·제(帝)·천(天)·지(地)·음양(陰陽)·덕(德)·일(一)·자연(自然)·후왕(侯王)·관장(官長)·기장(器長)·인주(人主) 등등의 개념이 전국(戰國) 말기의 개념일 수밖에 없으며, 『도덕경』의 성립연대는 전국 명가(名家)계열의 사상가인 공손룡(公孫龍)보다도 후대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치엔무의 주장은 마왕퇴(馬王堆) 노자 백서(帛書)의 발굴(1973), 곽점촌(郭店村) 노자 죽간(竹簡)의 발굴(1993)과 같은 놀라운 사건으로 빛을 잃고 말았다. 『도덕경』이라는 문헌이 우리의 통념보다 일찍 성립한 문헌이라는 사실이 물리적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치엔무에게는 실증주의라고 하는 근대적 과학정신이 있었고, 중국이 복고사상에 묻혀 개명한 세계로 나아가고 있지 못하다는 통한(痛恨)이 있었다. 그래서 고대 서물의 실증적 하한선을 모두 내려잡았다. 이것을 의고풍(疑古風)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의 짜깁기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의고풍과 같은 건강한 시대정신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정통정경지존이라고 하는 보수적 통념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치엔무의 주장에 우리는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몇몇 개념의 문헌학적 대비로 인하여 『도덕경』이라는 서물의 존재성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도마복음서에 설령 후대적 관념이 삽입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도마복음서를 후대의 짜깁기 날조로 간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도마복음서는 마가복음에 앞서 엄존한 것으로 그 프로토텍스트는 AD 50~AD 70년 사이에 성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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