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료제 전통 유지하며 행정서비스 질 높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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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호 10면

독일과 한국은 정당과 의회의 발전, 지방분권 정도, 시민사회의 분화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전통적으로 안정적인 관료제 행정을 유지해온 공통점이 있다. 독일이 군주제, 공화정, 독재정치, 민주정치 등 불안정한 정치체제의 소용돌이에서도 경제사회적 발전을 이룬 요인으로 행정과 직업공무원 제도의 발전을 꼽을 수 있는데 이는 우리와도 유사하다. 관료제(Bureaucracy)에 관한 이론적 연구 역시 약 100년 전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세계화에 따른 국가 간 경쟁의 격화, 통일에 따른 재정부담 증가, 신(新)공공관리적 행정개혁의 국제적 확산이 이어지면서 독일은 행정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독일 사민당의 슈뢰더 총리는 집권 직후인 99년 12월 신중도 노선에 입각한 행정서비스의 현대화 프로그램인 ‘현대국가-현대행정’을 발표했다. 정부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기능과 시민사회가 공동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을 구분해 정부와 사회가 행정의 책임을 분담한다는 등의 4대 원칙을 제시했다. 이러한 정책기조에는 이전 기민당 정부에서 추진한 시장주의에 기초한 신공공관리적 요소가 강조되는 '능률적 국가'가 아니라, 시민사회의 참여를 촉진하고 정부는 여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조성적 국가'의 이념이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제1차 행정개혁의 결과가 긍정적이라고 판단한 독일 정부는 2004년에 다시 제2차 행정개혁안을 발표했다. 행정개혁의 이념이나 추진방식 등은 제1차 개혁과 비슷하지만, 제2차 개혁에서는 행정의 효율성과 효과성(목표 성취도)을 강조하고 국민에 대한 행정서비스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2차 개혁안은 현대적 행정관리, 관료제 축소, 전자정부 등 크게 세 개의 주요 프로젝트로 나뉜다. 이러한 행정개혁의 전체적인 내용 구성은 우리나라의 참여정부에서 추진한 행정개혁의 내용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부조직 개편에 관심을 집중한 우리와 달리 독일은 정부-시민사회 기능분담과 지방정부 변화까지 동반하는 전(全)방위적 시스템 개혁을 동시에 진행했다.

행정개혁의 유형을 그 강도에 따라 현상유지, 현대화, 시장화, 최소화 등과 같은 네 가지로 분류하면 독일은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현대화 전략은 예산·관리·회계 등 보다 신속하고 유연한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주로 행정국가의 전통이 강한 대륙형 국가에서 볼 수 있다. 시장 메커니즘의 제한적 활용이 특징이다. 독일은 현상유지에서 시장화로 나아가다 다시 현대화로 방향을 튼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90년대 초 시장화의 요소가 강했던 기민당 콜 정부의 행정개혁은 독일의 전통적인 체제에는 부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슈뢰더 정부에서 현대화로 방향을 전환했는데 현재 집권하고 있는 기민당의 메르켈 정부도 슈뢰더 정부가 표방한 행정개혁 노선을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독일은 오랜 기간에 걸친 행정개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층제적 조직구성이나 학력·신분과 연계된 인사제도 같은 전통적인 행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90년대 이후 영미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 국가들이 신공공관리에 기초한 행정개혁을 광범위하게 도입한 것과 구별되는 점이다. 영미계 국가와 한국의 공직사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직급 파괴, 공무원 연봉제, 개방형 임용제 등은 독일에서는 생소한 용어다. 또한 행정조직 운영에서 영미계 행정에서 널리 쓰이는 ‘책임운영기관’이라는 단어도 흔한 용어가 아니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영미 국가에 비해 행정개혁의 성과가 적더라도 이것이 곧 독일 행정체제에 경쟁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법률과 규정을 강조하는 관료주의, 절차주의는 독일 행정의 약점으로 지적돼왔다. 법률 중심의 정책관리가 결정과 집행의 신속성을 저하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독일 행정의 장점은 행정관료의 높은 전문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교육훈련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고 공직자의 청렴성, 행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정부개혁이 추구하는 가치와도 밀접히 관련된다. 독일 행정체제는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정당과 의회의 통제)를 보다 중요한 가치로 설정하고 경제적 효율성은 이를 보완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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