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가프리즘] 일제시대로 되돌아간(?) 문화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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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서울에 경성(京城) 열풍이 불고 있다. 문화계가 온통 일제강점기 아래의 다양한 인물 군상에 매료된 것 같다. 우선 영화계를 보자. 31일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두 편이 동시에 개봉한다. 유승범 주연의 ‘라듸오데이즈’는 1930년대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제작 소동을 다룬다. 박용우 주연의 ‘원스어폰어타임’은 1940년대가 무대다. 석굴암 이마의 보석을 차지하기 위한 대도(大盜)와 일본 총독부간의 대결이 볼거리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앞으로도 쭉 쏟아진다. 김지운 감독, 송강호ㆍ정우성ㆍ이병헌 주연의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은 마카로니 웨스턴의 일제 강점기 버전이다. 벌써부터 올해 최고의 기대작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그런가 하면 박해일ㆍ김혜수 주연의 ‘모던보이’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들 영화에서 일제 강점기는 이전 영화에서처럼 단순한 시대적 배경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동안 충무로에서 제작된 ‘장군의 아들’‘바람의 파이터’에서는 일제 시대가 영웅을 그리기 위한 어렴풋한 배경에 불과했다. 대신 올해 개봉할 예정인 영화에서는 일제 강점기 그 자체가 소재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일제 시대라는 배경을 빼놓고는 이야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영화들이다.

경성 열풍은 이미 지난해부터 조짐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전봉관 교수(KAIST 인문사회과학부 교수)가 있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 부자들을 다룬 책 '럭키경성'을 펴냈다. 2005년과 그 이듬해 잇달아 펴낸 '황금광 시대' '경성기담'에 이은 경성 3부작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들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다. 전 교수는 암흑기라고만 알려졌던 일제 강점기에 오히려 더 다이내믹한 사건과 인물이 많았다고 입담 좋게 소개했다. 때를 같이 하여 각종 잡지에 일제 강점기 하의 한량 격인 ‘모던 보이’나 ‘모던 걸’들에 대한 소개가 부쩍 늘어났다.

경성 열풍의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이국적 복고 스타일(exotic retro style)의 유행과 관련이 있다. 우리 문화 소비자들의 복고 취향은 방송가의 사극 열풍으로도 확인된다. 옛 것에 꾸준한 관심을 보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과거’를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경성 열풍은 사극 열풍의 변주 혹은 마무리 과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사실 이국적 복고 취향은, 사회적으로 불확실성이 고조됐을 때 더 관심을 끌게 마련이다. 일제 강점기는 이런 취향에 가장 부합하는 시대다. 오랜 우리의 전통 문화와 신기한 서양의 근대 문물이 만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전봉관 교수는“이 시기의 매력은 의뭉스러운 데 있다”고 썼다. ‘의뭉스럽다’는 말은 겉으로는 어리석은 구석이 있지만, 속으로 엉큼한 데가 있다는 뜻이다. 이 시기의 성격을 한 마디로 요약해주는 말이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회고 열기를 곡해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은 지난 6일 일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제작 붐에 대해 “일제 통치에 대한 재평가”라고 했다. 종종 편협한 민족주의자의 면모를 드러내는 그는 이 기사로 적잖은 빈축을 샀다. 그의 아전인수격 해석과 달리, 경성 열풍을 주도하는 영화 대부분은 당시의 반일 정서가 소재다. 전 교수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도 일제 강점기 허술한 식민지 운용 시스템 아래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부침을 겪은 인물들이다.

그동안 일제 강점기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는 점도 경성 열풍의 배경으로 꼽을 수 있다. 서구 문화권에서 중세 시대처럼, 일제 시대는 문화적 암흑기였다. 이국적 복고를 갈구하는 요즘에는 이 점이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일제 강점기의 사건과 인물들이 상대적으로 더욱 신선하기 때문이다. 소재 고갈에 시달리는 우리 영화계를 비롯한 문화계 입장에서는 일제 강점기가 새로운 노다지나 다름없다. 1980년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중세를 배경으로 한 소설 ‘장미의 이름’을 내놓으면서 순식간에 유럽 문화계에 중세 열풍이 분 것과 비슷하다. 소설과 영화에 이어 일제 강점기의 경성을 소재로 한 어떤 문화 상품이 탄생할 지 관심을 모은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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