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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지난 5년은 한국 사회 발전에 기여한 국민의 업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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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DB)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1등 공신, 최근 자신을 가리켜‘폐족’이라고 지칭한 안희정씨. 지난해말까지 맡고 있던 참평포럼 상임위원장을 그만 둔 그에겐 아무런 공식 직함이 없다. 그는 요즘 고향인 충남 논산에서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그가 경향신문 17일자에서 최근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다음은 경향신문과의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 얼굴이 검어진 것 같다.
“고향인 논산ㆍ계룡ㆍ금산 지역구에 국회의원 선거 예비후보 등록을 했다. 지역활동을 하느라고 바쁘다. 거의 지방에 내려가 있다. 논두렁 밭두렁 길을 다니면서 막걸리와 소주를 받아 마시느라 그을린 모양이다.”

-대통령을 만드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는데 감옥에 갔다왔고 공식적인 직함조차 없다. 인간적으로 억울하고 섭섭하지 않나.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에서 배우 이영애씨가 이런 대사를 한다. ‘감옥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죄인이다’라고. 그 대사를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왜 나를 죽이십니까’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지 않겠나. (2002년 대선이) 끝나자마자 청문회에 세 번 불려나가고 검찰청 포토라인에 세 번 섰는데…. 하지만 대한민국이라는 수레를 밀고 가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저도 밟혀야 한다면 기꺼이 밟혀야 한다. 연극에 비유하자면 무대에 오르자마자 바로 총탄에 맞고 죽는 것이 내 배역이었다.”

-감옥에서는 어떻게 보냈나.
“참여정부 5년 동안 내가 나설 일은 없다고 생각하니 편해졌다. 그 마음이 없었다면 힘들었을 거다. 감옥에 가 보니 16년 전 학생시절에 수감됐던 그 맞은편 방이었다. 옛날에는 우상호(대통합민주신당 대변인) 등도 같이 있어서 ‘통방’도 했는데, 나만 혼자 그 장소에 앉아 있는 느낌, 정말 외롭고 쓸쓸하고 온갖 감정이 밀려들었다. 옆방에 한나라당의 서청원 전 대표와 김영일 전 사무총장, 서상목 전 의원 등이 계셨다. 또 정대철 전 대표, 이상수 전 사무총장,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도 계셨다.”

-그분들과 서로 인사하고 지냈나.
“잘 지냈다. 지금도 잘 모시고 있다. 특히 서상목 전 의원은 이감을 가서 저서를 보내주셨는데,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정 전대표에게서 한국정치사에 대해 많이 들었다. 박실장님과도 자주 뵈었다. 고수들한테 배우는 학교였다. 제가 가장 젊은 동창생일 거다.”

-지난 대선 직후 스스로 ‘폐족’이라고 했는데, 대선 결과를 어떻게 분석하나.
“대통합민주신당과 정동영 후보의 패배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국민이 이명박 후보와 한나라당을 선택했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 국민이 새로운 선택을 한 것이다. ‘이명박 후보가 부패했다’고 아무리 상대방을 공격해도 내 편이 생기지 않는 게 현실이다. 사회와 정치를 바라보는 틀이 변화해야 하는데, 우리 진영 사람들이 멈춰 있었다고 본다.”
-노대통령 때문에 선거에 졌다는 분석과는 입장이 다른데.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지지율이 65%였는데도 고어 부통령이 대선에서 졌다. 노대통령의 임기말 지지도가 30% 후반에서 왔다갔다 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7~8%, 김대중 대통령은 15% 정도였다. 정치에서 선거를 위해 사용되는 언어와 객관적 실체와는 다른 것 아닌가.”

-정동영 후보가 노대통령과의 관계를 잘못 설정했다고 보는 듯한데요.
“정후보가 인기 없는 영남 대통령을 끝까지 끌고 갔으면 정후보에게 돌팔매를 쉽게 던지지 못했을 거다. 한번은 슬쩍 차별화했다가 한번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정후보 본인도 각을 세우기 어려웠을 거다. 의리와 소신을 지키자, 아니다 차별화하자는 두 목소리가 동시에 정후보를 괴롭혔을 거다.”

-노대통령이 5년 동안 잘 했다고 보나.
“한국 사회를 위해 긍정적이고 역사 발전, 한국 사회 발전에도 굉장히 좋은 시간이었다. 참여정부 5년을 경과하면서 사회에서 없어진 단어를 생각해 보라. 정경유착, 권언유착, 빽, 측근정치, 부패, 관권선거, 공작정치 등 실제 이런 단어들이 지워졌다. 국민의 업적이고, 그런 국민의 요구를 따른 노대통령의 용기는 역사적으로 평가받을 거다. 선진 민주주의 사회운영의 출발선을 참여정부가 만들었다.”

-노대통령이 국민들을 매우 피곤하게 했다는 게 일반적 정서 아닌가.
“다녀보면 노대통령이 일은 잘했는데 인기가 없다고 한다. 독선적이고 이야기를 함부로 해서 그렇지, 일은 잘했다는 것 아닌가. 역사적으로 의미 있게 평가될 수 있는 부분과 현실적으로 인기가 있느냐 없느냐는 구분되어야 한다.”
-노대통령이 현실적 인기를 포기하고 역사적 평가만 받으려고 한 것은 아니지 않나. 현실정치에서 실패한 이유는 무엇인가.
“거기에 대해 정당과 정치의 실패라고 늘 이야기한다.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면 뭐하나. 영업조직이 뛰어나고 좋은 광고와 영업전술을 가지고 그야말로 알래스카에 가서도 에어컨을 팔 수 있는 전술이 필요했다. 그런데 후자의 영역에서 우리는 굉장히 취약했던 것이다.”

-어떤 취약성을 말하는 것인가. 국민들이 탄핵 이후 과반 국회를 만들어 주지 않았나.
“정치와 정당 구조의 취약성을 말하는 거다. 자신들에게 좀더 많은 혜택을 주기 바라는 세력이나 지역이 그런 보상을 받지 못했을 경우 돌아서는 정치적 구조가 문제였다는 것이다. 대북송금 특검을 받았을 때 호남이 그랬고, 영남 역시 우리쪽 사람이 아니라고 본 것 아닌가.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이라크 파병, 방폐장 문제만 해도 민주개혁세력이 이런 의제들에서 어느 정도 타협할 것인가 하는 정치망을 완성하지 못했다. FTA를 추진하니까 신자유주의 정책을 편다고 돌아섰다. 파병도 마찬가지다. 이런 정치와 정당구조의 한계가 어려움으로 다가온 것이다. 지지자를 보면서 정책을 해야지 혼자 정책을 추진하면 되느냐고 한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하지 않으면 국가 전체와 국민에게 불이익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손을 댔다. 방폐장 같은 문제는 그냥 둬도 되는 문제였다. 미룰 수 있는 과제들도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라살림을 위임받은 사람으로서 성실하게 일한 게 화근이었다.”
-노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이 여전한 것 같다.

“저도 집권세력 내에서 야당이 될 수 있다. 제가 야당이 되면 대통령 밑에 있다가 나가서 비판하는 어떤 사람보다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이다. 우리 한국 사회의 대립과 갈등구조 내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의 결과였다고 존중하려고 한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봐야 극복도 가능하다.”

-노대통령을 계승하면서도 다른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인 것 같은데.
“당연히 아버지 세대와 자식 세대가 다르다. ‘이제부터 내 실력이고 내승부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아버지가 잘못해서 내가 피해봤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운 자식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포부를 갖고 일하겠다는 것을 차별화다 뭐다 하면 저는 ‘노무현 가문의 후예’임을 선언할 거다. 민주개혁세력이 어떤 정책이 국민과 합의 가능한 정책인지 좀더 고민했으면 한다. 코너에 몰려 있는 부시 정부를 (이라크 파병으로) 도와서 남북 문제를 풀려고 했다. 분단국가의 지도자가 그 정도 전술을 펴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당신 친미주의자 됐느냐’고 공격하는 게 맞나. 미래의 과제를 가지고 싸울 때 승산이 있는 것이다. 전통적 지지기반의 회복만 가지고는 안된다. 새로운 사회를 향한 진보개혁세력의 새로운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공식 직함은 없었지만 노대통령은 여러 번 만났다. 무슨 얘기를 했나.
“돌아가는 일에 대해 귀동냥하는 정도였다. 공적인 지위나 현장에 있지 않기 때문에 저도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많이 듣고 여러 가지에 대해 고민하고 그랬다. 최근엔 정초에 만나 세배했다.”

-노대통령에게서 베이징에서 북한측과 접촉해보라는 지시도 받지 않았나.
“그야말로 심부름이었다. 위기상황에서 무슨 이야기 하나 들어보려 했는데 별 이야기 없어서 끝난 게 전부다.”

디지털뉴스 jdn@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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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소속기관

생년

[現] 대한민국 대통령(제16대)

1946년

[現] 대한민국 대통령당선인(제17대)

1941년

[前]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
[前] 통일부 장관(제31대)

1953년

[現] 포천중문의과대학교 의학과 병리학교실 부교수
[現] 포천중문의과대학교분당차병원 해부병리과 과장

19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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