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교수직 버리고 머리 짧게 깎은 박범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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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작가의 이미지를 이제는 벗어버리고 싶다. 내 문학 이력을 청년작가로 마감할 수는 없다." 중견 소설가 박범신(58)씨가 오랫동안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던 '청년작가'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그럼 앞으로 어떤 작가로 받아들여지고 싶다는 것일까?

25일 기자와 만난 박씨는 "올해로 42년째를 맞는 여태까지의 문학인생이 무효는 아니겠지만 연습이었다고 치고, 고독한 작가의 길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생의 마지막 작품을 쓰고 싶다"고 했다.'마지막 작품'은 인생 최고의 작품, 가장 밀도높은 작품을 뜻할 것이다. 박씨는 "문학에 순직(殉職)하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

박씨의 결연한 다짐은 두발 자유화 이전의 불량한 고등학생을 연상시키는 '스포츠형' 머리에서도 느껴진다. 올해 초 강원도 원주시 토지문화관 집필실에 입실하며 9㎜ 길이로 깎았다는 그의 머리는 대충 벌초한 산소처럼 삐죽삐죽하다. 박씨는 1992년부터 몸담아온 명지대 문예창작과의 교수직도 최근 미련없이 내던졌다.

그의 변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학 역정을 들여다봐야 한다. 박씨는 73년 등단 이후 지금까지의 문학인생을 3기로 구분했다.

"소설집 '토끼와 잠수함'에 모여 있는 단편들을 주로 썼던 78년까지를 1기로 볼 수 있다. 사회적 모순과 갈등에 주목한 작품들을 썼고, 문제작가라는 평도 듣던 시기였다."

2기는 화려한 문체와 단단한 서사로 무장, '죽음보다 깊은 잠''풀잎처럼 눕다''불의 나라' 등 베스트셀러를 양산하는 대중소설 작가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79년부터 느닷없이 절필을 선언한 93년까지.

박씨는 절필을 "문학적 기득권 반납"으로 표현했다. 손에 넣었던 것들을 스스로 내놓을 때는 그만큼 괴로운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80년 광주항쟁이 한창일 때 "무력하게 신문 연재소설로 밥이나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어느날 왼팔 동맥을 자르고 안양천에 뛰어들어 자살을 기도했다. 절필 직전 3~4년간은 '문학이 본질적으로 무엇이냐, 어떤 제단에 바쳐져야 하느냐'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3년간의 공백기간을 접고 96년 활동을 재개해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문학 3기는 밥벌이는 못됐지만 문학적으로 가장 큰 관심을 받은 시기다. 2000년 발표한 소설집 '향기로운 우물이야기'는 그에게 김동리 문학상을 안겼고 지난해에는 장편 '더러운 책상'으로 만해문학상을 받았다.

정체를 거부하는 도전정신을 청년의 특징이자 특권이라고 한다면 그동안의 꼬리표는 그의 문학인생에 무척 어울린다. 사실 청년작가라는 꼬리표도 '향기로운…'의 작가의 말에서 "온갖 수사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다만 청년작가의 이미지로 늙고 싶다"며 자초한 것이었다.

문학인생 4기에 발을 들이민 박씨는 "내가 늙는 속도로 봐서 65세 정년을 마치고 마지막 작품을 쓰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학교를 그만뒀다"고 말했다.

마지막 작품을 어떻게 쓸 것인지 아직 뚜렷한 계획은 없다. "인간을 황폐시키는 자본주의의 폐해와 그 과실에 취한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뿐이다.

"당장 1~2년은 여기저기 유랑하며 쉴 생각"이라고 그는 말했다. 박씨는 토지문화관 입실기간이 끝나면 우선 네팔을 다녀올 계획이다. "그곳에서는 자본의 독기가 빠진달까, 후련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inform@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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