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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제2부 불타는 땅 비내리는 나가사키(6)『옛날 티라니.내가 옛날에 어땠는데?』 『봤다고 하지 않았니.노래 잘하고 춤 잘 추고,먼 발치서 봤다만,눈알이 돌게 놀더구나.』 『병 주고 약준다더니… 못하는 소리가 없네.왜 한번 말이라도 붙여오지 그랬어?』 『사람이 다 똑같은 건 아니다.나는 그렇게 놀 줄도 모르고,돈도 없고.』 만만한 데다가 말뚝 박는다고 했다.나를 그처럼 막 다룬 것도,나 하나 죽여도 눈 깜박할 사람이 없어서였다는 걸 나도 모르지 않는다.두고 보자는 놈 무섭지 않다지만,어디 두고 보자.남의 눈에 피 내려면 제 눈에서는 고름이 나야하는 거다.고개를 젖혀 뒷머리를 벽에 기대는 화순을 노무라가 지켜보았다.
『이 일은 이쯤에서 덮어두는 거 같으니까,너도 곧 안나가겠니?』 『살아서 나가도 도로 그 자리.나간다 한들 무슨 달라질 게 있겠소.그래도 노무라상한테는 신세가 많았으니,나 몸 좀 추스르거든 한번 들렀으면 좋겠네.』 노무라가 고개를 저었다,천천히 두어번.
『어려서 팔려간 누나가 있다… 그 돈 가지고 아버지는 술 먹고 노름하고.군대 따라 만주에나 가 있지 않나 모르겠다.』 그말을 하는 노무라의 눈에 갑자기 물기가 어리는 것을 화순은 보았다. 이 남자는 누군가.그때 묶여 있던 날 이 남자가 풀어내릴 때는,아무래도 내가 죽지 싶었다.정신이 가물가물했었으니까.
화순이 가만히 퍼렇게 멍이 든 손을 뻗어 그의 볼에 대면서 말했다. 『나 한번만 안아 주겠소?』 노무라가 미동도 없이 화순을 바라보았다.
어서요 하듯이 화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노무라가 마치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를 들어올리듯 화순의 몸을 가만히 안았다.
그 어깨에 기대면서 화순이 눈을 감았다.지금,이 순간만은 당신이라도 내 편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을 당신은 모르겠지.왜놈이라 생각만 하면,누구 말처럼 네 등어리로 칼끝이 비어져 나오게찔러버리고 싶다만,그래…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건 아니지.혼자죽는 건 서러워서,내가 살아나가기만 해 봐라.어느 놈 하나 끌어안고 바다에 빠질까도 생각 안했던 건 아니다.그러나 내가 무슨 진주기생 논개도 아니겠고,길남이 살아서 땅을 밟았으면 되었다는 그 마음 하나로 견뎌냈던 건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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