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바루기] ‘첫’과 ‘처음’ 구분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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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첫 기억은 늘 설렌다. 그해 겨울 처음 내린 눈, 생애 처음 느낀 사랑, 사회에 나가 처음 받아 본 월급, 친구들과 처음 가 본 여행…. 그 속엔 낯설지만 즐겁고, 떨리지만 행복했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쉬 잊을 수 없는 이들 기억을 달리 ‘첫눈, 첫사랑, 첫 월급, 첫 여행’이라고도 부른다.

‘첫’과 ‘처음’은 모두 시간·순서상으로 맨 앞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처럼 두 단어의 뜻이 같다 보니 문장에서의 기능까지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1977년 경제학자 로버트 그린리프가 첫 제시한 ‘섬김의 리더십’이 새 정부의 국정 철학으로 떠올랐다” “국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이 2월에 첫 실시된다”와 같이 쓰고 있지만 ‘첫’을 ‘처음’으로 고쳐야 어법에 맞다.

‘맨 첫 번, 맨 앞’이란 뜻의 명사 ‘처음’은 용언을 꾸미는 부사어로 사용할 수 있지만 ‘첫’은 ‘제시하다’ ‘실시하다’ 같은 동사를 수식할 수는 없다. “우리의 첫 약속을 잊지 마”처럼 체언을 꾸며 주는 관형사 또는 ‘첫눈·첫사랑·첫차’처럼 일부 명사 앞에 붙어 그것이 처음임을 나타내는 별개의 단어로 쓰인다.

“경영이론 첫 제시” “배심원 제도 첫 실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첫’이 명사 ‘제시’와 ‘실시’를 꾸미는 형태 같아 보이지만 문맥상 ‘제시’와 ‘실시’는 ‘-해(-돼)’가 생략된 동사로 사용됐다. ‘처음’으로 고쳐야 바른 문장이 된다.

“그의 첫 공약이 이행될까?” “구체적인 정책안을 언론에 처음 공개했다”와 같이 ‘첫’과 ‘처음’은 품사가 다르므로 구분해 써야 한다.

이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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