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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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소파 옆에 꿇어앉은 아리영 아버지는 기도하는 자세로 길례의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시간이 멎은 듯 침묵이 괴었다.
창가에 작은 산새들이 다가왔다 호르르 날아간다.아리영 아버지의 손이 움직였다.
원피스의 앞단추를 천천히 정성 들여 하나하나 풀어 내려간다.
미색 실크원피스가 길례의 무릎 위에서 수밀도(水蜜桃) 껍질처럼 벗겨지고 풍만한 몸매를 싼 살색 슈미즈가 눈부시게 드러났다. 길례의 살갗은 거무스레한 편이다.
검지만 발그레 윤기가 돌아 암노루의 몸매처럼 탄력이 있어 보인다.남자를 도발하는 살결이다.
『까만 고기가 맛있다… 영국의 이런 속담 알아?』 대학 시절,캠퍼스 안에서 뒤쫓아 오던 남학생들의 음담을 귀 담은 적이 있다.들으란 듯이 일부러 크게 하는 소리다.
『그래.개고기,고래고기,흑돼지,흑염소,흑도미… 까만 고기야 다 고소하고 맛있지.』 『그것 말고 또 있어.』 『흐흐흐… 그건 날 걸로 먹어야겠구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모멸스럽고 화도 났으나 뾰족한 대응책이 생각나지 않았다.스스로약점이라 여기는 부분이 남자들 사이에선 호기(好奇)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도 의외로웠다.
젖가슴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전류에 닿은 듯 길례는 몸을 곧추 일으켰다.슈미즈 끈을 도로끼고 수밀도 껍질도 재빨리 주워 걸쳤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가? 말도 아닌 짓을 하고 있다.
정신 없이 뛰쳐나오면서도 화집을 안고 나온 것은 그나마 중년의 나이값을 한 셈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쓰리고 멀었다.
마흔여덟.
이 나이 고비에,이 사건.
그것은 분명히 사건이었다.아니 변란(變亂)인지도 모른다.남편아닌 외간남자와의 은밀한 만남.그 세속적인 의미는 빤하다.스캔들이다. 추문.치욕.반감.분개.중상.욕설… 「스캔들」(scandal)이라는 영어의 갖은 말뜻이 길례의 머릿 가에서 작은 산새떼처럼 흩날렸다.
그러나-.
아리영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그런 말뜻 무더기와는 거리가 멀다. 청정,편안,공명(共鳴),고양(高揚)… 그래서 더할 나위없이 우아한 것.
그래도 스캔들일 수밖에 없는가.
눈자위가 번졌다.
어째서 진작 만나지 못했을까.끝내 만나지 못하면 그뿐인 것을뒤늦게 만난 조화는 또 무엇인가.
어떻든 지각(遲刻)하여 만남은 왔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가슴 한 편에 타오르고 있는 작은 불이 벅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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