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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북녘동포>7.平祝이후 北의 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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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제13차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평축)-.
89년7월 평양에서 열린 이 축전이 90년대 북한의 격변을 몰고왔다.6.25이후 북한에 2만명이상의 외국인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것은 처음이었다.경제를 수렁으로 빠지게 한 최대요인이 됐다.옷차림과 머리모양이 달라지는 시발점이 됐다.
무엇보다 주민의 의식에 의문을 품도록 한 첫 계기가 됐다.거기에 임수경(林秀卿.한국외대생.全大協평축대표)이 무대의 가운데를 차지했다.임수경 충격파는「왜」라는 의문부호를 북녘동포의 가슴에 새기도록 한 채 오늘도 살아 있다.
평양당국은 평축이 끝나면「이밥 먹고 고기 먹는」새 세상이 온다고 약속하면서 성대한 잔치를 치렀다.그러나 잔치는 국고탕진으로만 끝났다.
▲평축의 연출과 통제=평축기간중 평양은「거대한 세트장」이었다.시민들을 통제하고 행사장이나 시가지의 분위기를「완벽한 시나리오」에 의해 연출했기 때문이다.김정일의 매제 장성택(張成澤)이총괄책임자였다.
시민통제에 관한 귀순자들의 증언.
『남한대표들이 평양에 오면 한달 전부터 지방주민들이 평양에 들어올 수 없듯 축전때도 평양의 외곽지대를 완벽히 봉쇄했다.평소에는 군인들이 군복을 입고 돌아다니는데,남북회담이나 국제행사때 군복차림으로 돌아다니다 걸리면 연대장까지 직위 해제될 정도로 심각하게 취급한다.』(윤웅.29) 『당시 낡은 차는 시내에돌아다니지 못하게 하고 주민들도 구역별로 통제했다.출근시간도 조절해 사람이 거리에 없게 했다.보통 출근시간에는 서울정도는 아니지만 평양도 대단히 붐빈다.행사장에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은돌아다니지 못하게 했 다.』(김명철.임영선) 당국이 행사장 연출에 들인 공(功)은 상상을 넘는 것이었다.
김명철(35)씨의 증언.
『나는 평축시「춤추는 조」「왔다갔다 조」두 군데에 동원됐다.
「춤추는 조」는 내가 살던 만경대구역에서 5백명이 차출돼 짝을지어 춤을 배웠다.다른 사람들은 4월초부터 7월 중순까지 4개월간 연습에 참가했으나 나는 시범교육팀이어서 2 월말부터 시작해 5개월간 연습했다.군중무용은 사로청(社勞靑)조직이 주관했다. 「왔다갔다 조」에서는 만경대유희장에서 일정구역(약 2백m)을 맡아 정해진 시간에 그곳을 계속 왔다갔다 했다.
그밖에도 외국인이 유희시설을 이용할 때 박수치거나 줄서 있는「분위기조」,수박 1통.캔맥주 3통과 사탕 등을 주고 외국인이지나가면 노는 척하는 「가족놀이 조」,관성열차 등 놀이기구만 하루종일 타는「유희시설 조」등이 있었다.』 조명순(34.가명)씨는『전국적으로 키가 1백67~1백70㎝의 여자들이 평양으로 차출됐다』며『강계에서는 7월식료사업소 기사장의 딸이 뽑혀 올라갔는데 키가 크고 외국어도 할 줄 알아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고 전했다.
예술인단체,도예술단,2급기업소이상의 전문예술단,취주악연주학생들은 모두 평양으로 소환됐다(여금주.21).
『평축시기에 북한 전역의 보위부원이 평양에 동원되다시피했다』(안혁.27)는 것.안골체육촌 안과 지하수망의 보위업무는 국가보위부.안전부가 맡았고 체육촌 외곽은 지방에서 차출한 안전원들이 책임졌다.
▲평양시민교양자료=평축 뒷얘기의 백미는 평양시민교양자료집을 주민들에게 암송시킨 것.당국은 외국인의 예상질문 1백개에 대한답변자료를 만들어 주민들에게 학습시켰다.
김명철.윤웅씨등의 증언.
『시민과 축전지원단은 1백항의 질문.대답이 담긴 시민자료 1백80여쪽을 모두 암송했다.책자 암기교육이 3개월쯤 진행됐다.
직장에서는 매일 정해진 분량을 외우지 못하면「평양에서 살 자격이 없다」고 망신을 주고 퇴근도 시키지 않았다.축 전이 끝나자이 책자는 도로 회수됐다.』 문답을 보면.
-당신 집에는 왜 냉장고가 없나.
『공급체계가 잘 돼 있어 돈만 있으면 아무 때나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때문에 냉장고는 필요없다.』 -평양에는 왜 택시가적나. 『원유가 나오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에 주민들이 대중교통수단을 주로 이용한다.지하철은 대단하다.』 -평양건물에는 왜 앞에만 타일을 붙였는가.
『당신은 왜 넥타이를 앞에만 매고 뒤에는 안 매나.』 ***“넥타이 뒤에매나” ▲경제를 파국으로 이끈 평축=북한은 평축을위해 역량을 총동원했다.조총련은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지원했다.평축기간의 물자공급과 가두판매대의 인원은 거의 조총련 몫이었다. 서평양 만경대구역에만 각종 경기장이 포함된 안골체육촌,서산.청년호텔과 광복거리의 아파트 5천가구가 신축됐다.다른 지역에는 1만5천가구의 아파트,15만명수용의 김일성경기장,국제친선회관,하수처리장 등 대형시설이 2년여간 지어졌다.끝내 완공을 못본 1백5층의 유경호텔도 평축용이었다.
『지방의 변변한 원자재는 특호 제품으로 생산돼 평양으로 올라가고 고급승용차도 모두 평양으로 징발됐다.』(여만철.51) 『사로청 등 여러 조직.단체들이 평축준비자금을 당국에 바쳤다.자강도에서는 송이버섯.고사리.도라지.참나물.인풍술.산꿀술 등을 평축물자로 보냈다.』(고청송.34) 주민들에게서 평축자금을 거둔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그러나 평양은 축전기간에 살판이 났다.김동만(43.가명)씨의증언. ***평양시내만 살판 『평축때는 평양시내에 물자가 풍부했다.식량특별배급이 실시됐고 식료품.햄.주스 등이 공급됐다.행사일꾼들에게 중국산 양복지를 배급했으며 간부들은 옷을 따로 해입게 하고 운전기사에게는 양복을 한 벌씩 주었다.평양에서는 이기간에 물건사재 기가 매우 심했다.』 평축의 후유증은 곧 여러가지로 나타났다.
『주민들은 평축이 정치적으로는 성공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실패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평축이후 배급이 잘 안되고 보통 1~2개월씩 밀리기 시작했다.시골에서는 6개월이나 밀렸다.』(김광욱.27) 『평축이 끝나자 인민무력부 군사건설국 건설여단의 자동차 1천여대중 80%가 섰다.군대에서 영양실조가 나타난 것도 이때부터다.80년대 중반까지는 영양실조라는 말이 없었다.』(임영선) 『평축이후의 경제악화는 출장원.물자조달원이 실감나게 체감(體感)했다.어느 곳에 가도 원자재를 공급받기 어려웠다.』(정진만.47) ▲평축의 사회적 파장=평축이 미친 사회적 파장은만만치 않았다.
안명진(27)씨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평축이후 북한사회의 움직임에 대해 특별강의를 들은 장본인이다.그의 증언.
『특강내용은 평축이후 사회에서△「사회주의 무너뜨리자」「우리가제일 못산다」「우리는 독재사회다」「간부들을 죽이겠다」등이나 김정일을 욕하는 반당(反黨).반혁명적 벽보가 많아졌다△자본주의나라의 비디오테이프.책자 반입이 늘었다△달러가 유행 하고 있다는등이었다.식량배급이 지연되고 있다는 얘기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다.』 안혁씨는『평축시기에 외국인들은 대동강변을 웃옷을 벗은 채 걸어 다녔고 이런 자유로운 행동이 평양시민의 의식변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그는 또『임수경의 옷,즉 청바지와 흰 티셔츠가 유행해 장마당에서 청바지가 2백~3백원(노동자 월급 80~1백20원),티셔츠가 50~60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평축이후 사람들의 옷이 화려해지는 등 외국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김동만),『평축이 끝난 뒤 국가안전보위부 정치범수용소경비대에 입대한 신병들마저 디스코풍의 유행춤을 추어 놀랐다』(안명철)고 분위기를 전한다.
▲임수경충격파=임수경씨는 북한주민들에게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남겼다.평축을 전후해 입북했던 문익환(文益煥)목사,작가 황석영(黃晳暎)씨는 북녘에서 별로 잘 알지 못했다.임수경씨에 대해 긍정적이고 호의적 탄성마저 자아내는 데 반해 文 .黃 두 사람에게는 주민들이 별무반응 또는 부정적 반응이었다고 귀순자들은 입을 모았다.
주민들은 임수경씨가 집회등에서 보인 배짱과 자신감있는 태도에충격을 받았다.
『주민들이 사회주의에서 자란 사람과 자본주의에서 자란 사람이다르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그러나「왜 그렇다」는 얘기는 누구도하지 않았다.임수경과 북한대학생의 대화를 지켜본 주민들은 상당히 놀랐다.북한대학생들은 준비된 원고가 없으면 우물쭈물했기 때문이다.』(정진만) 『임수경이 평양의 학생소년궁전에서 어린이들이 붉은 넥타이를 매 주니까「내가 빨간 물이 들어 평양에 온 것은 아니다」며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는 얘기가 주민들의 화젯거리였다. 또 김책공대에서「나와 연애할 남자가 있으면 나서라」고말했는데 한 명도 못 나섰다는 얘기도 있었다』(김대호.35),『임수경이 북한역사학자들이 당의 정책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대목을 비판했다거나 대학체육관의 군중집회에서「대학 생들이양말을 신지 않은 것을 지적해 그뒤 모두 양말을 신었다」는 등의 얘기가 돌았다.』(임영선) 남북한대학생의 차이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에는 색다른 것도 있었다.
***林씨 석방에 충격 『판문점에서 임수경이 단식할 때 북한대학생들도 함께 단식했는데,그녀는 1주일을 버텼으나 북한대학생들은 2~3일밖에 못버텼다는 소문이 퍼져 체력에서 남한에 뒤진다는 얘기도 돌았다.』(임정희.30.개성시간호사) 당국은 임수경씨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극도로 노력했다.안혁씨는 『김책공대 학생회 간부로 임수경과 동행한 친척에게서 「수경이의 기분이 거슬리게 하는 것은 뭐든 즉각 보고토록 하라」는 지시를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주민들은 임수경씨의 방북(訪北)을 전후해 남한에 대한 인식을새롭게 하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임수경을 보면서 이남은 자유롭게 외국여행을 하거나 마음대로발언할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청송) 『90년 12월12일 제3차남북고위급회담때 북한기자들이 임수경씨 자택을 방문했던 모습을 TV로 방영했는데「집이 좋고 잘 산다」고생각했다.저녁식사 모습을 보여줄 때는「딸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는데 부모는 어떻게 그냥 잘 살고 있는 것일까」를 모두 궁금하게 여겼다.당국은 주민들의 반응을 의식해서인지 이튿날부터 TV방송을 내보내지 않았다.』(여금주) 그리고『임수경이 남한으로돌아간 뒤 사형당하지 않고 징역만 사는 것을 보고 놀랐다』『나중에 임수경이 석방돼 더욱 놀랐다』거나 『그녀의 가족이 무사한데 놀랐다』는 것이 귀순자들의 이구동성(異口同聲)이었다.임수경은『우리의 소원은 통 일』이라는 노래를 북녘 전역의 남녀노소에게 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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