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이야기’ 만화로 그리는 강현주 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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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신인섭 기자

최근 네티즌들 사이에 ‘만화 그리는 여경’으로 소문난 서울 강남경찰서 논현지구대 강현주(26) 순경. 강 순경은 지구대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소재로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에 4~5컷 만화를 연재하고 있다. ‘뽈(폴리스를 뜻함) 스토리-강 순경의 좌충우돌 지구대 이야기’라는 제목의 이 연재 만화는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인터넷 정기 구독자만 1200여 명이고, 지금까지 총 방문자 수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내 차 빨리 찾아내란 말이야! 이 경찰 XX들은 다 어디서 뭐하고 있어?”

술에 취한 30대 남자가 욕설과 함께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지구대에서 난동을 부린다. “진정하라”는 경찰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 동안 술주정을 해댄다. 경찰은 차량 도난 신고 확인서를 떼어 준 뒤 “차를 찾으면 즉시 연락하겠다”며 이 남자를 돌려보냈다.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승용차 찾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경찰 전산망에 수배 차량으로 등록하고 기다려 보기로 한다.

30분 뒤 지구대에 전화가 걸려 온다. 문제의 그 남자다. “차를 찾았어요. 누군가 훔쳐간 줄 알았는데 주차해 둔 곳을 깜빡했지 뭡니까.” 여전히 술에 취한 목소리.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경찰은 “사건 종결 처리를 해야 하니 택시를 타고 와달라”고 요청한다. 얼마 뒤 다시 지구대를 찾은 이 남자는 도난 사건 처리 대신 음주 측정부터 받고 면허취소 처분을 당한다. 술이 덜 깬 상태에서 자신의 차를 직접 몰고 지구대까지 오는 바람에 음주운전 사실이 현장에서 딱 걸린 것이다.

지난해 11월 초 서울 강남경찰서 논현지구대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지구대에 근무하고 있는 강현주 순경은 이 사건을 소재로 ‘차량도난’이라는 제목의 만화를 그렸다.

“신고하는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차량 도난신고가 접수되면 작성해야 할 서류 업무가 엄청나게 많아요. 허위신고로 판명 나더라도 그냥 끝나지 않아요. 사건 종결에 필요한 서류 작성 절차를 또 거쳐야 하거든요. 긴급히 처리해야 할 사건은 많은데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는 거죠.”

만화를 본 네티즌들이 경찰 업무를 조금이나마 이해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담겨 있다. 지난해 4월 초 연재를 시작한 ‘뽈 스토리’는 64화까지 나왔다. 납치 신고 전화를 받고 출동한 뒤 벌어진 어이없는 상황을 그린 ‘납치’(32화), 도로 순찰 도중 우연히 수배자를 체포한 이야기를 다룬 ‘검문검색’(33화) 등 현장에서 겪은 일들이 모두 만화의 소재가 된다. 그녀의 만화가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사실’과 ‘유머’가 적절하게 잘 섞여 있기 때문. 경찰의 애환과 잔잔한 감동이 살짝 녹아있다.

강 순경이 경찰이 되고, 만화까지 그리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그는 고향 제주도에서 대학을 마치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속 경찰의 꿈은 커져만 갔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제가 경찰이 됐으면 하셨어요. 저 역시 도로 한복판에서 호루라기 하나로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이 어찌나 멋있던지…”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태어나 단 한 번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제주를 떠나 무작정 상경
했다. 수중에는 단 돈 100만원뿐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시원 생활을 한 지 1년 반. 그녀는 2005년 3월 5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경찰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6개월간 중앙경찰학교에서 합숙훈련을 거친 뒤 11월 초 논현지구대에 배치됐다.

논현지구대 전입으로만 따지면 강 순경이 가장 오래됐다. 계급은 제일 낮지만 ‘왕고참’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또 논현지구대 홍일점이다. 지구대장을 포함해 69명의 경찰이 근무하고 있지만 여경은 그가 유일하다. 관할 지역 내에 강남 유흥가가 있는 논현지구대는 전국에서 112 신고가 가장 많이 접수되는 곳으로 근무 강도가 그 어떤 지구대보다 세다. 낮 시간에는 30~40건, 야간에는 70건으로 하루 평균 100여 건의 신고가 접수된다. 그만큼 출동 횟수가 많고 처리할 사건이 넘쳐난다.

“경찰이 된 지 1년쯤 지났는데 문득 돌아보니 정신없이 일해 온 것 같았어요. 남자들처럼 힘으로 범인을 제압해 사건을 해결하기에는 한계도 많았고요. 내가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경찰 생활을 의미 있게 해보고 싶어 경찰 이야기를 만화로 그릴 생각을 한 것이죠.”

만화에서 엿볼 수 있듯 그가 경험한 2년의 경찰 생활은 상상했던 것만큼 멋지지만은 않았다. 술 취한 시민들에게 발로 걷어차이기도 하고, 오토바이를 검문하다 부딪혀 상처를 입기도 했다. 생전 들어보지 못한 욕도 실컷 들어봤다.

“친절하게 봉사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일부 시민이 경찰들을 함부로 대할 때는 정말 힘들어요. 혼자서 울기도 했지요. 경찰도 인간인데 화풀이 대상이 되면 솔직히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잖아요.”

이런 현실과 다르게 스크린에서 여경의 모습은 예쁘고 멋있게만 그려진다. 그래서 여경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는 절대 보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만화를 통해 그가 보는 세상을 그려내고 이를 다양한 사람들과 공감한다. 바쁜 업무 중에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휴대전화에 메모를 하는 이유다.

그는 ‘만화가’로서 나름의 원칙을 갖고 있다.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것
은 배제한다. 불특정 다수의 네티즌들이 보게 되기 때문이다. 또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이야기를 꾸미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장치를 만화 곳곳에 배치한다.

“한 네티즌이 e-메일을 보내 왔어요. ‘당신 만화로 경찰에 대해 가졌던 나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경찰청장도 못하는 일을 일개 순경인 당신이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죠. 과찬이라는 걸 알지만 보람을 느낍니다.”

이 만화를 본 동료 경찰들도 격려 e-메일이나 댓글을 단다. 이들은 “공감하지만 마냥 웃을 수는 없더라”는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힘든 경찰 업무를 너무나 사소한 부분까지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만화로 뜻하지 않게 장려상도 받았다. 만화를 본 한 독자가 경찰청 홈페이지 게시판에 ‘우수 경찰관’으로 추천했던 것. 강 순경은 지구대에서도 ‘인기 짱’이다. 여성스러운 외모이지만, 동료들은 털털하고 때론 선머슴 같은 그를 ‘남자’라고 말한다.

이제 3년차에 접어드는데도 여전히 끔찍한 현장을 보면 몸이 떨린다는 강 순경. “그래도 제복을 입고 있으면 어떤 ‘포스(힘)’를 느껴요. 사복을 입고 있을 때는 절대 들어가지 못할 것 같은 사건 현장도 제복만 입으면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게 돼요.”

인터뷰가 끝날 무렵 강 순경은 기자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고생만 하다가 환갑이 된 어머니의 이름 석자를 꼭 신문에 내달라는 것이었다. “김순여 여사님. 저는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고성표 기자 muze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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